‘식품 자본주의’ 팽배한 미국보다 못한, 우리 농가공권 현실

  • 입력 2022.10.09 18:00
  • 수정 2022.10.09 21:25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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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우리나라의 「식품위생법」은 제2조에서 ‘영업’을 ‘식품 또는 첨가물을 채취·제조·가공·조리·저장·소분·운반 또는 판매하거나 기구 또는 용기·포장을 제조·운반판매하는 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농업과 수산업에 속하는 식품 채취업’은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는 다시 말해 1차 생산을 하는 농어민이 이를 가공해 판매하는 ‘영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농업에서 농산물 생산과 떼려야 뗄 수 없었던 ‘농가공’은 이제 반드시 자본을 거쳐야만 하는 ‘산업’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이 도입된 이래 HACCP 인증을 의무로 받아야 하는 식품의 범주는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이제는 참기름과 고춧가루 등 전통적인 물건을 포함해 농가공품 대부분이 식품자본의 상품영역에 편입돼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HACCP 인증에는 큰 비용이 든다. 소규모 가공업자들의 인증 편의를 목적으로 ‘소규모 HACCP’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시설비와 인증비용을 포함해 최소 수천만원의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가령 제과류를 생산하기 위한 소형 시설을 구축하는데 드는 비용은 최소 평당 100만원대로 알려져 있다.

청주시 미원면 주민들과 함께 ‘미원산골마을빵’을 만들어 파는 김희상 대표는 “50평 규모 인증 제과제빵시설 구축에만 1억원을 지출했는데, 농민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니 컨설팅을 받아야 하고 그쪽에만 1,000만원은 기본으로 쓰인다”라며 “보관 온도 기록 하나만 해도 하루 3회를 해야 하는 등 농사를 지으면서 인증 후 관리를 유지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농가 단위에서 이를 맞추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농민들을 위해 설비와 자격을 갖춘 지역농산물가공센터가 들어서기도 하지만, 관련 법에 지방자치단체의 의무가 쓰이지 않은 탓에 설립 여부가 순전 단체장의 의지에 달려있어 확산이 더디다. 센터에서도 소규모 가공 수요자 다수를 수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잦다. 올해 상반기가 돼서야 전국에 총 101개의 가공센터가 세워졌는데, 아직 시·군당 1곳도 확보되지 않은 셈이다.

지난 2021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장 양옥희, 전여농)이 서삼석·위성곤·강은미·윤미향 국회의원과 함께 연 ‘소규모농가부엌법 제정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공개된 회원 대상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지역농산물가공센터에 대한 문제를 물었을 때 이용자가 많고, 이용시간에도 제약이 있어 정작 필요한 시기에 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는 응답이 주를 이뤘다. 또 대개 일정량 이상의 원물을 투입해야 시설 이용이 가능해 소규모 생산자는 애초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됐다.

의외의 사례, 미국의 ‘소농식품법’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대표적인 사례는 놀랍게도 ‘유엔농민권리선언’에 반대표를 던졌던 미국에 있다. 상대적으로 농가공 행위가 자유로웠던 유럽과 달리 미국은 최근에서야 제한적으로 농가공을 허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수단이 바로 ‘소농식품법(Cottage Foods Law)’이다. ‘정식 주소가 등록된 가정의 부엌에서 주 정부가 허용한 농가공품을 만들고, 이를 정해진 방법으로 판매한다’는 대원칙만 지키면 별다른 시설 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누구든 언제나 생산할 수 있다. 이 법은 지난 2000년까지만 해도 불과 8개 주(州)만 시행하고 있었지만, 지난 20년 간 점진적으로 확산해 이제는 하와이·뉴저지 단 2개 주를 제외한 미국 전역에서 시행하고 있다.

이 법은 그 주체를 농민으로만 한정한 것이 아니고, 재료의 원산지에도 딱히 제한을 두지 않는 등 농가공권의 본질적 보장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입법 취지를 보면 가공에 나서는 소농들의 첫걸음을 고려한 장치인 것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미시간주는 “이 법을 통해 소규모 가공업자는 새 사업이 자신에게 적합한지 확인할 수 있으며, 농민들은 제과나 잼류로 판로를 확장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법이 본격적 면허 식품 가공 사업의 디딤돌로 자리하길 바란다”라고 이 법을 소개하고 있다.

미국 템플대학교 공중보건법연구센터가 각 주법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소농식품법의 관리 규정은 주마다 조금씩 다른데, 예를 들면 9개 주에서만 영업 전 허가가 필요하며, 영업 전 관련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곳도 15개 주에 불과하다. 이들에 대한 정기 혹은 비정기적 조사를 진행하는 주 역시 32곳에 그친다. 10개 주에서는 제품이 가정에서 만들어졌다는 라벨을 부착할 필요조차 없다. 이처럼 영업 관련 규제는 들쭉날쭉하고, 또 전반적으로 느슨한 편이다.

대신 ‘팔 수 있는 것’, 그리고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은 대체로 모든 주법에서 동일성이 나타난다. 통상 누가 어떻게 만들어도 위해성이 적을 것으로 판단되는 가공품만 허용함으로써 안전성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가령 빵·제과 등 구워낸 음식, 과일 기반 잼, 건조를 거친 각종 향신료·분말, 가공 견과류, 볶은 원두, 식초 등이 예로, 실온 보관이 가능하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외형을 통해 금방 인식이 가능한 것들이다. 최근에는 pH 4.6 이하의 저산성을 띄는 식물성 절임류(피클)에 대한 허용도 늘어나는 추세다.

대부분 농장 직판 혹은 길거리 노점, 시장, 직접 배송 등 생산자와 구매자의 직접 대면을 통해서만 팔 수 있게 한 것도 공통된 특징으로, ‘생산자의 얼굴을 보고 먹는다’는 로컬푸드의 성격을 깊게 가미해 안전성을 담보하고자 하는 점이 흥미롭다. 전체의 절반에 못 미치는 약 23개 주에서는 안전성 관리의 목적으로 판매 상한선을 두고 있는데, 그 한계점은 제법 높은 편이다. 예를 들면 미시간주에서는 올해부터 연간 7만8,000달러(약 1억1,000만원)까지도 부엌에서 만든 농가공품을 팔 수 있게 했다.

 

농가공 권리 다룬 ‘농민기본법’ 제정운동

국제연합(유엔)은 지난 2018년 12월 17일 열린 총회에서 유엔인권이사회가 결의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선언(유엔농민권리선언)’을 최종 채택하고 이 내용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촉구했다. 유엔농민권리선언은 제11조 1항과 16조 2항을 통해 농민이 가공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했다.

전여농의 농가부엌법 정책토론회에 나섰던 윤병선 건국대 교수는 “지자체의 조례를 통해 농민의 소규모 가공·판매를 활성화하는 것은 제약요인이 많고 상위법과의 충돌을 이유로 조례제정을 회피할 수 있다”라며 “첨가물, 보관방법 등을 반영해 저위험 가공식품을 규정하고 직접 판매 가능 품목, 판매 가능 농민을 설정함으로써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요구를 반영해 국민입법센터(대표 이정희)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전여농, 진보당과 함께 농가공 권리의 법적 보장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들이 제안한 ‘농민·농업·농촌정책 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농민기본법)’ 초안에는 그동안 드러난 우리 농업의 현실과 해외 사례를 참고해 농가공의 권리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우선 기존 법안 제21조 ‘식품산업의 육성’은 ‘농산물 가공산업 육성’으로 명칭을 바꾸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농산물을 가공·유통·판매하는 농민에 대하여 시설기준 완화 및 지원시책을 세우고 시행하여야 한다’는 의무를 담은 2항을 추가했다. 이는「식품위생법」이 상위법으로 군림하며 농민의 가공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고, 이를 돕고자 하는 지방정부의 노력 또한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과 직결되는 조항이다.

또 농민의 권리를 정의할 목적으로 신설된 ‘제2장 농민의 권리’의 제12조에서는 농산물가공권 또한 다루며 ‘농민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가공하여 유통·수출·판매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했다. 이어지는 같은 조 2항에서 식품위생교육을 받은 농민이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주재료로 위생상 위해가 발생할 우려가 없는 가공을 통해 농산물 가공품을 제조·유통·판매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는 의무를 정부와 지방정부에 부여했다.

여기서 말하는 위해 발생의 우려가 없는 가공이란 ‘식품첨가물을 사용하지 않고, 농산물을 단순히 자르거나, 껍질을 벗기거나, 말리거나, 소금 등에 절이거나, 숙성·발효시키거나, 즙을 짜거나, 가열하는 등의 처리’로 미국의 소농식품법이 허용하고 있는 농가공품의 특성과 거의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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