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름

  • 입력 2021.03.21 18:00
  • 기자명 한승호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승호 기자
한승호 기자

올해 아흔셋, 구순을 넘긴 할머니가 짚고 온 지팡이를 내려놓더니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았다. ‘단결 투쟁’이 적힌 붉은 머리띠를 이마에 동여맸다. 화순군풍력대책위원회의 ‘농촌파괴 반대한다’는 깃발을 흔들고 어색하게 쥔 주먹으로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구호도 함께 외쳤다. 점심식사 또한 앉은자리에서 대충 해결했다.

“아이고 (풍력발전) 안 하는 것이 좋제. 한 것이 뭣이 좋아. 자연은 그대로 두는 게 가장 좋아. 우리 동네 사람들은 다 나왔제. (풍력발전) 못하게 하려고.”

할머니의 말은 간단했고 명료했다. 할머니는 전남 화순군 동복면 가수리의 만수마을에서 왔다고 했다. 이제는 “농사도 뭣도 안 허고” 편히 계신다는 할머니는 짧은 인터뷰 내내 마을을, 자연을 가만두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주민들이 군청과 군의회의 입장을 들어야겠다며 진행한 ‘풍력발전 이격거리 원상복구를 위한 화순군민대회’에서도 맨 앞자리에 앉아 군의회를 바라보며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집회 시작 4시간여 만에 군 도시과장이 나와 그간의 사정을 해명할 즈음엔 할머니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앞서 화순군의회는 친환경적이라는 이유로 풍력발전시설 설치를 위한 허가 기준을 완화하겠다며 마을로부터의 풍력발전시설 이격거리를 대폭 축소했다. 이에 반발한 주민들은 이격거리 원상복구를 위한 화순군 도시계획조례 개정안을 주민 발의했고 군민대회까지 열어 군청과 군의회에 시급한 처리를 촉구한 것이다.

집회 내내 기자는 할머니의 주변에서 머물렀다. 집회장의 또다른 모습을 촬영하더라도 이내 할머니 근처로 돌아와 구순 촌로의 모습을 살폈다. 이날 집회의 핵심은 할머니의 표정, 몸짓과 행동에 있다고 믿었고 화순뿐만이 아닌 신재생에너지 사업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모든 농산어촌에서 마주할 수 있는 농민들의 모습이 할머니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별과 나이의 적고 많음을 떠나….

하여, 뇌리에 깊이 새긴 할머니의 이름은 조연순(93)씨다.

키워드
#기자수첩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