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품종 배 이렇게 맛있는데, 몰라서 못 먹죠”

전남 나주 하늘이영농조합법인

  • 입력 2020.11.29 18:00
  • 수정 2020.11.30 11:01
  • 기자명 한우준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권상준 나주하늘이영농조합법인 대표가 페인트칠로 신고 배나무와 구분해 관리한 국내품종 배나무를 소개하고 있다.
권상준 나주하늘이영농조합법인 대표가 페인트칠로 신고 배나무와 구분해 관리한 국내품종 배나무를 소개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인 한-칠레 FTA가 발효됐다. 농민들에게는 우루과이라운드(UR)에 이어 2차 대(對)개방농정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칠레산 포도의 시장진입을 허용한 결과로 지난 2019년 포도를 키우는 농가는 2010년 대비 39%(1만3,371농가)나 감소했다. 면적으로는 9,152ha(28%)다. <한국농정>은 첫 FTA 협상이 시작된 뒤로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FTA가 우리 농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점검하고, 수입농산물 개방 여파를 이겨낸 농민들의 후일담을 공유한다. 또 앞으로 우리 농정이 이 풍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고민해본다. 

[예고] 숫자로 느껴보는 ‘개방농정’

① FTA로 농촌이 잃은 것들, 어떻게 보상하나

② 개방 풍파에 맞선 우리 농민들

③ FTA 시대 우리 농정의 방향은

사과와 함께 명절 대표 과일로 손꼽히는 배는 사과의 ‘부사’처럼 일본산 품종이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신고’ 품종이 그 주인공으로 과의 크기가 매우 크고, 식감이 단단하고 아삭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고는 우리 배 농업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있다. 배는 사과와 마찬가지로 농산물 시장을 개방할 때마다 보호를 받아 수입산 배와 직접 대면하는 처지는 면했지만, 실제로는 시장 자체를 다른 과일에게 조금씩 내어주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배 재배면적은 10년 전에는 3만1,000ha에 달했지만, 올해는 겨우 1만7,600ha 수준이다. 수입산 열대과일이 시장 점유율을 늘려가는 한편 국내에서도 샤인머스켓과 같은 새로운 개념의 과일이 등장했다. 소비 성향이 보다 달고 먹기 편한 과일을 찾는 쪽으로 크게 달라졌지만 우리 배는 수십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특징을 그대로 가진 탓에, 소비자들은 배를 일상적으로 먹는 과일로 여기기보단 사실상 명절 제사상 위 홍동백서를 구현하기 위한 구색용품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사실 배는 열매의 크기가 보다 작으면서도 당도가 훨씬 높은 국내품종들이 이미 개발돼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배는 명절과일이고, 따라서 배 농사는 명절농사’라는 공식이 굳어진 상황에서 농가들은 모험을 쉽게 감행하지 못했다. 품종을 교체한 나무에선 3년 정도 소득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큰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농촌진흥청이 지난 2015년부터 국내육성품종 보급에 힘을 주면서 ‘추황배’, ‘화산’, ‘신화’, ‘그린시스’ 등의 재배가 늘어나 현재 10% 수준까지 차지한 상황이다.

황승욱·신숙자 부부의 배 농원에서 신씨가 수확 후 저장한 신고 품종 배들의 포장작업을 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배 선호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지만 농가 입장에서 신고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주 수입원이다.
황성욱·신숙자 부부의 배 농원에서 신씨가 수확 후 저장한 신고 품종 배들의 포장작업을 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배 선호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지만 농가 입장에서 신고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주 수입원이다.

“우리나라는 일본 외래 품종인 신고에 목을 매달고 있어요. 일단 모양새가 예쁘고, 누구나 편하게 재배할 수가 있죠. 누가 취재를 왔는데 물어보더라고요. 일본에 늘 당하고만 살았는데 왜 농가들이 신고만 재배하느냐고.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2005년부터 국내 품종에 관심을 가졌다가 2008년부터는 거의 ‘올인’하다시피 했죠.”

권상준 하늘이영농조합법인 대표(우리한국배연구회장)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주에서 추황배 재배에 도전한 선구적인 농민이다. 물론 그도 수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신고를 재배하기는 하지만, 전체 출하량의 30% 이상을 국내품종으로 채워 넣는 보기 드문 배 영농을 하고 있다.

“저도 처음에는 100%가 신고였죠. 하지만 신고보다는 국내 품종을 유통하는 게 훨씬 더 재미가 있어요. 신고가 꽉 짜여진 틀 안에서 기계로 뽑아내는 공산품과 같다면, 국내 품종들은 다양해요. 색상, 맛, 껍질모양, 크기… 특색이 있죠. 이것들을 살려서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시도가 참 재미있었어요.”

신고의 당도는 보통 12브릭스(Brix, 과수의 당도를 나타내는 단위) 안팎이지만, 현재 보급되는 30종 이상의 국내품종 대부분 신고보다 당도가 더 높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이는 추황배 역시 14브릭스 수준의 단맛을 낸다. 권 대표는 국내품종의 가장 큰 문제는 과수의 질이 아니라, 다름 아닌 소비자들이 이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권상준 대표가 추황배 시식을 권하고 있다.
권상준 하늘이영농조합법인 대표가 추황배 시식을 권하고 있다.

“모양새만큼은 신고를 따라갈 것이 없기는 합니다. 색깔도 선명하지 않고 약간 지저분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특화사업을 하면 충분히 승부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는 무조건 크고 봐야 한다는 인식이 예전부터 깔려 있어 이렇게 신고만 먹게 된 건데, 신고는 명절에 맞춘다고 생육을 조절하다보면 맛이 없는 경우가 생겨요. 젊은 세대들은 크기가 아니라 맛이 1순위잖아요. 또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죠. 맛있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앞으로의 배들은 바로 국내품종이더라, 확신했죠. 일단 한 번 먹어보기만 하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어요.”

시식해 본 추황배는 예전에 먹던 배와는 아예 다른 과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맛이 달랐다. 한 마디로 ‘너무 달았다’. 과즙이 월등히 많아, 먹다보면 씹는 것 자체가 힘든 신고보다 훨씬 먹기 편했다. 그의 말을 반대로 해석해보면, 소비자 입장에서 신고 이외의 다른 배를 먹어 볼 기회가 그동안 전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같은 법인 소속으로 올해 국내품종 ‘한아름’의 시험육성에 참여했던 황성욱씨 역시 FTA 등으로 과일 수입이 늘어난 이후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배를 먹지 않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고는 주로 제사용·선물용인데, 요즘 젊은 세대야 뭐 제사를 지내겠어요? 일단 맛이 있어야 하는 게 제일이에요. 그리고 신고는 너무 커요. 하나 썰어 놓으면 혼자 먹지도 못하고. 그런 측면에서 당도 높은 국내품종을 정책적으로 좀 밀어줄 필요가 있어요.”

과피흑변 현상을 방지하는 추황배 전용 열매봉지.
과피흑변 현상을 방지하는 추황배 전용 열매봉지.

나주배연구회 회장으로도 오랜 기간 활동했던 권 대표는 추황배 재배기술을 전파하며 참여농가를 집단화해 APC·대형마트·수출 등 다양한 판로를 확보하는 한편, 보다 소비자 친화적인 배 생산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추황배는 껍질 일부가 검정색으로 변하는 과피흑변 현상이 잘 나타나는 품종인데, 껍질의 색깔만 변할 뿐 과육에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권 대표는 소비자들의 오해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연구 끝에 생육과정에서 과피흑변을 막아주는 열매 봉지를 개발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배 소비 촉진을 위해 소포장 거래를 추진해 온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해부터 배의 유통규격을 15kg, 7.5kg에서 각각 10kg, 5kg으로 전환하는 시도를 계속해왔는데, 한국배연합회가 농가 의견을 수렴한 결과 반대 의견이 거세 올해에도 결국 무산됐다. 그러나 권 대표의 법인은 오래 전 5kg 추황배 12수를 한 손에 들 수 있는 전용박스까지 개발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