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수급정책에 민주주의를

  • 입력 2019.09.22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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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말도 못하게 폭락한 마늘 경매가에 줄담배를 피고, 밭떼기 거래마저 끊긴 양파밭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고, 출하조차 하지 못한 배추를 갈아엎는 농민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국단위 품목단체 결성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농민들의 굳센 의지로부터 시작됐다. 한승호 기자
말도 못하게 폭락한 마늘 경매가에 줄담배를 피고, 밭떼기 거래마저 끊긴 양파밭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고, 출하조차 하지 못한 배추를 갈아엎는 농민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국단위 품목단체 결성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농민들의 굳센 의지로부터 시작됐다. 한승호 기자

노지채소는 열악한 우리 농업 중에서도 천덕꾸러기 같은 신세다. 축산이나 과수·시설채소는 그나마 목돈 회전이 되고 쌀은 주곡이라는 상징성이라도 있지만 노지채소는 늘상 이 품목 저 품목에 치이는 처지다. 그래서인지 농가를 대표해야 할 품목별 농민단체 또한 유난히 발달하지 못했다.

노지채소에 전국단위 품목단체 결성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지난해부터다. 치명적인 공급과잉 상황과 비효율적·소극적인 정부 정책이 2년 동안 반복됐고 올해는 농민들의 경제적 피해까지 현실화됐다. 간절함과 위기감, 절망과 분노가 노지채소 농가들을 밑바닥에서부터 움직였고 마침내 몇몇 품목에서 전국단위 조직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최근 사단법인 승인까지 받은 전국양파생산자협회를 필두로 전국배추생산자협회와 전국마늘생산자협회가 속속 창립총회를 마쳤고 전국대파생산자협회가 뒤이어 창립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채소 수급정책엔 농민들이 참여할 길이 없었다. 농협이나 유통업자 조직, 포괄적 농민단체들이 있지만 품목단위로 농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정부 수급정책은 대개 현장과 동떨어졌다는 비판을 받아왔고, 폭락 시엔 유통업자들을 보호하고 농민들의 피해를 방기하는 실책 아닌 실책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품목단체들의 창립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전국에 산재된 양파농가, 마늘농가, 배추농가의 목소리가 각기 하나의 창구를 통해 정부에 전달될 수 있게 됐다. 아직은 회원 규모가 기천명 단위에 불과한 신생조직들이지만 노지채소 품목조직으로선 비교할 대상조차 없으리만큼 독보적인 규모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다. 농식품부가 조금만 손을 내밀어준다면 단순한 참여를 넘어 수급정책을 주도할 수도 있는 역량을 갖춘 조직들이다.

하지만 농식품부는 자신들의 정책에 전에 없던 비판을 던지는 주체적 품목단체들을 불편해하는 낌새다. 농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농식품부로서 품목단체의 탄생을 적극적으로 반겨야 하는 게 상식이지만 도리어 외면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함평 지역구 국회의원인 이개호 전 장관이 함평에서 열린 양파협회 창립총회에 ‘표 관리용’ 축전을 보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협회들의 창립총회는 농식품부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진행됐다. 수급정책 수립도 종전보다 오히려 더 독단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이다.

농민 주도형 수급정책은 산지의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반영할 수 있으며 농민들의 자발적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다. 단체들은 이미 정부 정책에 대한 단편적 비판을 넘어 체계적인 정책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정부와 농민들 사이에 정책테이블이 제대로 차려진다면 지금의 체제로는 도달할 수 없는 혁신적 수급정책이 나오리라는 기대도 드물지 않다.

시대는 참여와 자치와 혁신을 지향한다. 농산물 수급대책은 농업계·비농업계 모두로부터 구태를 지적받고 있으며 이에 정부가 아닌 농민들이 스스로 혁신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농식품부는 바야흐로 그 기틀 위에 새 집을 지어야 할 책무를 떠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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