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이젠 빛을 보자

  • 입력 2018.05.04 09:51
  • 수정 2018.05.18 10:47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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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옛 전옥서 터인 서울 종로네거리 영풍문고 앞에서 열린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에서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를 비롯한 관계 인사들이 동상을 가리고 있던 막을 걷어내고 있다. 이날 제막된 ‘전봉준 동상’은 123년 전 일본군에 의해 압송될 당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24일 옛 전옥서 터인 서울 종로네거리 영풍문고 앞에서 열린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에서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를 비롯한 관계 인사들이 동상을 가리고 있던 막을 걷어내고 있다. 이날 제막된 ‘전봉준 동상’은 123년 전 일본군에 의해 압송될 당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한승호 기자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동학농민혁명만큼 우리 역사에서 그 이명이 다양한 사건도 없다. 농민들의 봉기를 침략의 명분으로 삼은 일제는 그들 조선왕조를 전복시키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성을 무시한 채 ‘동학란’으로 폄하했었고, ‘그 용어’에 지나치게 민감한 군부독재시절에는 ‘운동’이라는 단어가 혁명을 대체했다.

그 의의와 규모, 주도 세력을 놓고 ‘갑오농민전쟁’, ‘동학혁명’ 등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역사적 사건의 이름은 100주년을 맞았던 지난 1994년에도 그 무엇으로 정해지지 못해 우정사업본부가 기념우표 발행을 포기하는 일까지 있었다.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집권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동학농민혁명의 진짜 이름을 감추기 급급했던 역사는 이 사건이 숭고한 혁명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 대사건의 본질에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봉건사회 척결과 민족자주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세기가 바뀌고 나서야 국가공인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존중받기 시작했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것을 시작으로, 올해에는 시행령이 개정돼 이명박정권 당시 폐지된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활동을 재개한다.

민중사의 가치를 높게 사는 사학자들과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2000년대를 거치며 동학농민혁명의 재평가는 많은 진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대중적인 인지는 사건의 중요도에 비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전봉준이나 동학농민혁명을 주역으로 한 그 흔한 대하사극이나 영화 한 편조차 제작되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 거리에선 ‘새야새야 파랑새야’가 울려 퍼졌다. 사단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와 서울특별시, 시민단체 등이 힘을 모아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세우며 제막 행사를 연 것이다. 비록 동상의 크기로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세종대왕과 이순신 제독처럼 ‘민중지도자 전봉준’의 역사적 가치를 내걸고 사시사철 공공장소에서 대중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평등과 자주를 쟁취하기 위한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제막식에서 “이곳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제국주의와 독재 그리고 정권의 부패에 항거했던 3.1운동과 4.19혁명, 6월 항쟁, 촛불시민혁명의 현장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별법 시행령 개정 이후 이번 동상 제막을 첫걸음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하고 그 본질을 널리 알리려는 각계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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