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공짜는 없습니다

  • 입력 2017.01.08 20:58
  • 수정 2017.01.08 21:33
  • 기자명 김순재 전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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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재 전 조합장]

세상에는 좀 많이 배운 사람이 있고, 놀기를 좋아해서 안 배운 사람도 있고, 형편이 어려워서 못 배운 사람도 있는 법이지요. 저는 꼭 그 가운데 쯤에 있는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농협이라는 곳에 통장도 하나 없던 제가 스물여섯에 농협 통장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스물여덟쯤에 농협의 조합원이 된 것은 오로지 외상으로 박스도 사야했고, 농약도 사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농협의 조합원이 되면 외상으로 농약도 구입이 가능하고, 박스 같은 자재도 일정기간 외상 구매가 가능 했으니까 우리나라에서 ‘많이 배운 사람들이 만든 농협’에 조합원이 된 것이었지요.

1990년, 제가 농사를 직업으로 시작했을 무렵의 농촌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이나 안 배운 사람들은 좀 잘사는 편에 속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좀 못사는 편이었습니다. 당시의 저로서는 명색이 대학을 나왔으니 당연히 많이 배운 사람이었지만 많이 못사는 축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사는 게 힘들어 ‘제 코가 석자이다’ 보니, ‘농협’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알바가 아니었습니다.

간판으로는 농협과 면사무소를 분류해도 농협과 면사무소는 제가 먹고 사는 것과는 관련이 별로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20년을 살다가 농협에 관심을 갖게 되고, 농협의 조합장이 되고 보니, 요즘 젊은이들 표현으로 ‘헐~! 이게 뭐야?’였습니다.

조합장 선거를 할 당시, 옆에서 조언을 하시는 분들이 저에게 “‘니가 조합장이 되면 농협을 개혁하겠다’ 해라”하시면서 농협의 현실에 대해 진심어린 진단들을 하셨습니다. 당시의 저는 당선을 목표로 하였기에, 표현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제가 개혁을 하겠다면 개혁의 대상-내용들을 설명해야 하고, 그 개혁의 대상이 그들을 향해 개혁하겠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쁠 거고, 선거과정에서 기분 나빠진 사람들이 저를 반대하면 떨어질 거라는 막연한 논리가 머리를 엄습해서 그냥 두루뭉술하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르게 하겠습니다”하면서 불법(?) 선거운동을 다녔습니다.

할 수 있는 선거운동이 거의 없었음으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들을 좀 만나고, 몇몇 분에게는 편지글 좀 적고, 모임에 열심히 나가고, 전에는 축의금을 부탁하여 전달하던 수준의 잔치집을 열심히 가고, 본래 밤이라도 조문은 잘 다녔는데 더욱 열심히 갔습니다. 겨우 당선이 되고, 조합장에 취임하기까지 40여일의 시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농협을 공부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농협의 일을 살폈습니다. 농협 직원의 6할이 돈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음으로 돈과 관련된 일을 살폈습니다. 작은 농기계에도 여러 기어가 물려서 돌아가듯이 금융 살피면서 경제사업 살펴보고, 지도사업 살펴보고, 궁금한 자료 요청해서 보고, 농협과 관련해서 유명하신 분들께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받으며 ‘딱!’ 느낀 게, ‘이거 낭패네’였습니다.

농협의 빗장을 바르게 열고 채워서 농협법 제정 취지가 실현되는 길을 농민들이 만들어야 한다. 농가 경제의 융성한 발전을 상징하는 농협의 심볼마크.

인사 조치 후 온갖 구설에 시달리다

우리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직원 출신이신 분들이 조합장을 하셨는데 직원으로서의 근무 경력도 없고, 농촌지역에서 새마을 지도자나 이장, 농협의 임원 경력도 없는 저로서는 농협의 사업 내용들을 살피면서 ‘낭패’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제가 삼십대 초반일 때 우리 마을의 농협 대의원이셨던 분이 농협 이사로 선출되는 일이 있어서 겨우 농협 대의원 일 년 몇 달 한 것이 농협 관련 경력의 전부였던 저로서는 ‘이 일을 우짤꼬? 낭패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조합장으로 취임하는 식을 가지고, 첫 조치는 아주 작은 단위의 업무 조정만 하였습니다. 어디서 들은 소리는 있어서, 조금 성실해 보이는 직원을 기획 총무계로 발령을 내고 한 달 보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생산적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합장실에 칩거하면서 몇 가지 자료를 챙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달 630만원가량의 보수는 받으면서 몇몇 자료를 꼼꼼히 보았습니다. 틈틈이 직원들과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차도 마시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기를 좀 지나서 실질적인 첫 업무분장-인사 조치를 했습니다. 한 명 한 명 면담·건의 받은 내용을 기초로 하여 전체 직원 중에서 두 명의 본점 상무들을 대기발령 시키고, 다른 직원들은 거의 희망하는 곳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희망대로 발령 내주지 못한 직원에게는 사유를 설명하고 다음을 약속했습니다. 농촌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젊은 조합장이 자기보다도 나이가 많은 지역농협의 상무 두 명을 대기 발령시킨 일로 저는 엄청 시달렸습니다. 들려오는 소리들로는 ‘젊은 사람이 안하무인이다’ ‘당선이 되고, 인사 보복조치를 한다’ ‘조합장이 업무를 모르니 대기발령자가 대기가 해제되면 갈 자리도 없도록 인사를 했다’ 등등. 대기발령 사유를 설명하고 한 달이 지날 무렵 대기발령자 중의 한 명이 명예퇴직 신청을 했고, 지역에서 많은 구설에 시달리면서도 명예퇴직 조치를 했습니다.

또 다른 대기발령자 한 명은 징계사유를 본인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지만 지루한 공방을 거치며 절차를 거쳐 해직시켰습니다. 이 징계해직은 이후 38개월간의 민사소송을 거쳐 대법원의 최종 확정을 받았습니다.

농촌지역 농협을 좀 이해하시는 분들은 그 정서를 알겠지만, 징계사유의 현장 적발이 아닌 다음에야 오랫동안 이어져 온 지저분한 관행을 징계사유로 삼아 간부직원을 해직시킨다는 것은 얽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개 인근의 농협과 인사 교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합장이 취임 초기이고, 두 명의 간부를 농협에서 내보냄으로서 제가 달리 추진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한 저항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조합장 초기에는 언 발에 오줌 누듯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면피만 하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공개하기 힘든 엄청난 질타들을 받으며 첫해를 보냈습니다. 다행히, 농촌에 살면서 싸움질을 좀 한 덕분인지, 그리 심한 질타들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기에 절실하게 느낀 것이 ‘공짜’라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농협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농협은 농민에게 공짜로 던져진 것이었습니다. 농협이 농민에게 공짜로 주어진 것이라면 제게 돌멩이를 던질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때 저는 지금의 ‘농협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 농민에게 공짜로 던져준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농민에게 툭 떨어진 농협

제가 조합장의 임기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이 ‘이것은 공짜로 던져진 것인데, 이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였을 겁니다. ‘농협은 좀 많이 배운 사람이 형편이 어려워 못 배운 사람에게, 그냥 불쌍해서 준 것이다.’ 이게 제가 그때 느낀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농협 구조가 갖추어진 1960년대에 농사나 짓던 농민이 뭘 알아서 협동조합을 만들자고 했겠습니까? 그리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지 못할 때 그렇게 만들어진 농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농업협동조합은 우리나라 같은 산업구조에서 매우 중요함에도 오랫동안 그냥 방치 상태로 둔 것과 같은 것이었고 농협은 ‘놀기를 좋아해서 안 배운 사람들의 놀이터로 있는 것과 같았다’는 게 당시의 제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농협이 만들어지고 나서 중앙권력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의 권력자들이 조합장을 임명해 왔습니다.

그랬던 농협이 제가 농사를 짓기 시작할 1990년 무렵에 농민들이 별로 노력 안했는데도 80년대의 민주화 열풍에 편승하여 대부분의 농협이 조합장을 직선제로 뽑게 된 것이었고, 그 훨씬 이전에는 농민들이 농업협동조합을 절실하게 요구하지 않았는데 농협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농민들이 거의 반강제적으로 농협에 출자를 했다는 숱한 이야기들이 다수의 농민들의 바람 속에 농협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90년 중 후반 무렵에 농협 직원 중에서 당시로서는 약간의 친분이 있는 한 명이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저도 형편이 어려웠지만 소문으로 그 직원의 아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아이가 아프니 ‘형편이 어려워서 그러는가 보다’하고는 없는 돈을 구해서 빌려 주었는데 며칠 있으니 그 직원이 그 돈을 농협에 출자해놨다면서 출자 증권으로 돌려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출자 증대의 개인목표가 할당되어지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 직원이 그랬다는 것을 뒤에 알았습니다. 저의 경우처럼 많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동조합에 출자하고 이용하여 유지했다고 보기보다는 직원들에 의해서 지금의 모양새가 됐다는 많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사실상 농협이 생기는 과정에서 공짜로 생겼으니 주인인 농민들이 그 가치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주인이다’는 막연한 인식만 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주인이라는 생각만 농민들 인식에 있고 이용과 이용에 따른 이익은 다른 곳에서 많이 발생하다 보니 농협은 농민에게서 자연이 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하다보니 농협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일을 해도 그 존재가 비판만 받고 사업의 형태는 계속 기형으로 존속이 가능했다는 것이 조합장직에 있었던 당시의 제 생각이었습니만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농민들의 농협으로 조금씩 바로 잡아가야

사람의 몸에 비유하자면 오랜 시간동안 관리를 잘못해 척추가 굽었다면 그 척추를 바르게 하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영구 장애를 불러올 소지가 매우 큰 상황이면 매우 조심스럽게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농협은 농협법 제정 취지와 달리 사업의 운용방식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상호금융을 하고 있으며 농민들에게 자재도 공급하고 농민들의 농산물을 팔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농협이 해온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내용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기형적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이러한 부실은 태생과 성장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진행되어진 것이고 이것의 책임은 그 내용을 집행한 당시의 힘 가진 자에게 묻기보다는 명백히 농민들에게 있다고 저는 봅니다.

물론 많이 배운 사람들인 농림축산식품부나 농협의 중앙조직이 기안하고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은 농민이 하거나 농민이 뽑은 대표자들이 했으니 기안자인 농림부나 농협중앙회를 탓하면 안 됩니다. 농민들에게 농협은 공짜로 주어진 것이었고 우리 농민들은 소중함을 몰랐고 다룰 줄 몰랐던 탓입니다.

제가 있었던 창원 동읍 지역은 협동조합 사업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참 좋은 사람도 많았던 곳입니다. 이것은 우리 지역만이 아니라 대다수 농촌지역이 그러하다고 봅니다. 조합장 임기를 수행하는 초기에 ‘농민의 피땀을 빨아먹고 산다’는 힐난을 받으면, 퇴근하여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일정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주변의 농민들에게서 자주 격려를 받고 격려 속에서 힘을 얻으며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고 신뢰의 틀이 약간은 생겼습니다. 농협이 농민들의 것이 아니고 직원들의 것이라면 그리 된 구조에 잡음을 줄여가면서 천천히 바꿔 가야 합니다.

막연하게 풀어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농업협동조합 현실에 기반해 차곡차곡 풀어 가봐야 합니다. 농협이 만들어진 시기는 입에 풀칠도 버겁던 시기여서 놓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조금씩 바로 잡아가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농협의 빗장을 바르게 열고 바르게 채워서, 농협법 제정 취지가 실현되는 길을 같이 열어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새해부터 ‘김순재의 농협 빗장풀기’를 매월 1회 연재합니다. 창원 동읍농협 조합장을 역임했던 김 전 조합장이 들려주는, 늘 곁에 있으나 잘 알지 못했던 농협 이야기에 함께 귀 기울여 볼까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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