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포장재 감축 과제 외면하는 정부 … 시민이 새 길 만든다

  • 입력 2023.11.26 18:00
  • 수정 2023.11.26 18:59
  • 기자명 강선일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 22일 `강원UNIV(강원대) SDGs(지속가능한 발전) 페스타'가 열린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학교 미래광장에서 강원지역 대학생들이 인근 춘천·가평의 농산물을 종이봉투에 담아 판매하고 있다.
지난 22일 `강원UNIV(강원대) SDGs(지속가능한 발전) 페스타'가 열린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학교 미래광장에서 강원지역 대학생들이 인근 춘천·가평의 농산물을 종이봉투에 담아 판매하고 있다.

기후·환경위기 대응을 위해 유통 과정에서도 플라스틱·비닐 등 처치 곤란 쓰레기의 대량 발생을 줄여야 한다는 시민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는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국내 현행법 중 무엇도 농산물 유통 과정의 포장재 감축을 강제하지 못한다. 정부가 사실상 농산물 포장재 감축 과제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셈이다.

온갖 ‘예외조항’에 강제성 없는 가이드라인 … 머나먼 포장재 감축 제도화

현행 법제도 중 농산물 포장문제를 다루는 법률은「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자원재활용법)」, 「식품위생법」,「농수산물품질관리법」등이다. 이 중 농수산물품질관리법과 식품위생법은 포장 규격 문제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며, 자원재활용법에서 포장 폐기물 발생 억제 내용을 다루긴 하나, 농산물 포장의 경우 ‘예외사항’이 적용된다. 자원재활용법의 하위법령인 「제품의 포장재질·포장방법에 관한 기준 등에 관한 규칙」에선 ‘농수산물품질관리법 제5조 제2항에 따라 표준규격품 표시를 한 농수산물’에 대해선 여타 종합제품(2개 이상의 제품을 함께 포장한 제품)과 달리 포장공간비율 제한(25% 이하)을 적용하지 않는다.

한편 지난 8월 28일 환경부는 ‘농산물 포장 가이드라인(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가이드라인의 기본 방향은 감량·재사용·재활용 등을 통한 농산물 과대포장 억제 및 적정포장 유도긴 하나, 이 역시 ‘예외조항’이 마련됐다. 과일·채소 등 농산물이 가공·조미 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시 제품포장규칙에서 규정하는 과대포장 규제(포장공간비율 및 포장횟수 제한)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다만 과일 선물세트는 과대포장 규제대상 포함). 가이드라인의 기조도 “(친환경 포장설계 기준을 따르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포장재 사용 감축을 ‘권고’하는 수준에 그친다.

농산물 포장문제를 다루는 법률들이 포장재 감축문제를 직접 건드리지 못하거나, 그나마 감축문제를 언급하는 법률·가이드라인도 온갖 예외조항으로 포장재 감축 여지를 줄이는 가운데, 지난 7일 환경부의 일회용품 사용 규제 계도기간 1년 유예 발표는 정부가 포장재 감축 등을 통한 환경보전 과제를 사실상 외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주텃밭협동조합, 조합원들의 힘으로 무포장 유통 추진

경남 진주시 평거동 진주텃밭협동조합 진양호점에 설치된 잡곡통들. 소비자가 직접 용기를 가져와 담거나 매장 내에 마련된 신문지에 담아가면 된다. 잡곡통 아래 ‘일상 속 녹색실천’을 알리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한승호 기자
경남 진주시 평거동 진주텃밭협동조합 진양호점에 설치된 잡곡통들. 소비자가 직접 용기를 가져와 담거나 매장 내에 마련된 신문지에 담아가면 된다. 잡곡통 아래 ‘일상 속 녹색실천’을 알리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한승호 기자

정부가 외면 중인 농산물 포장재 감축 과제의 실현을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에 나서는 이들이 있다.

대표 사례 중 하나로 경남 진주시 진주텃밭협동조합(진주텃밭) 사례를 들 수 있다. 2020년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진주텃밭 조합원들의 ‘환경적 실천’ 요구가 늘어나던 가운데, 그해 3월 총회에서 조합원들은 진주텃밭 매장을 ‘녹색실천매장’으로 만들자고 결의했다. 진주텃밭은 같은 해 8~9월에 걸쳐 1~2호 매장을 녹색실천매장으로 바꿨는데, 그 과정에서 무포장 농산물 유통도 늘려갔다. 현재 진주텃밭 매장들은 환경부에 의해 ‘녹색특화매장’으로 지정됐다.

눈여겨볼 점은 진주텃밭의 무포장 농산물 유통 노력은 농민·소비자·실무자 등 여러 조합원의 끊임없는 토론 속에서 전개됐다는 점이다. 조합원들은 농산물 유통과 관련해 다양한 아이디어, 예컨대 △종이봉투·신문지 등을 활용한 포장 △무포장 상태에서 필요한 만큼 식재료를 담아가기 △소비자가 직접 필요한 만큼 사갈 수 있도록 벌크판매(농산물을 한가득 쌓아놓고 소비자가 퍼가게 하는 식의 판매방식) 확대 △집에서 각자 필요한 용기를 가져오거나, 소유한 용기가 없을 시 장바구니 대여 △비닐봉지를 전면적으로 없애고 모두 장바구니에 담아가도록 유도 등을 제안했다.

위와 같은 조합원 아이디어 중 다수가 실현됐다. 지난 14일 진주 평거동 진주텃밭 진양호점(3호점)에 들어서자마자 첫 번째로 눈에 띈 것은, 매장 우측 벽면에 걸린 유리통들이었다. 여기엔 유기농 찹쌀, 메주콩, 쥐눈이콩, 토종 율무 등 각종 잡곡류가 담겨 있는데, 이걸 구매할 사람은 유리통 아래쪽 손잡이를 밀어서 뽑아낸 곡물류를 본인 소유 장바구니나 그릇, 또는 매장 내에 마련된 신문지(이 또한 조합원들이 재활용을 위해 매장에 기증한 것) 등에 담아가면 된다. 말하자면 곡물류 ‘뽑기’ 기계인 셈이다. 진주텃밭 측은 이러한 잡곡류를 비닐·종이 등으로 포장해 판매하지 않고, 각자 필요한 만큼 뽑아갈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잡곡류가 진열된 곳 옆엔 조합원들이 자율포장해 갈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저울이 있었다.

대형마트라면 채소류를 비닐 포장해서 팔 텐데, 진주텃밭 진양호점 냉장 진열대에 놓인 신선 채소류는 대부분 무포장 상태였다. 몇몇 무포장 채소류 옆엔 고무줄들을 비치해 놨다. 고무줄로 채소류를 몇 단씩 묶어서 구매하게 할 목적으로, 고무줄은 분실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언제든 다시 채소류를 묶을 용도로 쓸 수 있다.

고구마가 담긴 상자는 무염료·무형광 종이상자였다. 상자에 별도의 채색을 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원을 덜 낭비한 상자로, 재활용도 더 용이하다는 게 도상헌 진주텃밭 사무처장의 설명이다.

농산물 무포장 유통 실현은 실무자들만의 노력으론 불가능하다. 여러 조합원의 자발적 실천이 쌓이고 쌓여 모범을 만들고 있다. 진주텃밭 각 매장엔 ‘초록작당’이라는 조합원 자원봉사 소모임이 있는데, 말하자면 무포장 유통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는 모임이다. 이들의 활동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아이스팩 관리다.

도상헌 사무처장은 “초록작당은 사용한 아이스팩을 깨끗하게 씻어서 닦은 뒤 다시 얼리는 작업을 주로 한다”며 “다른 유통매장에서 아이스팩을 많이 사는 한편, 진주텃밭에선 지난 몇 년간 아이스팩은 단 한 개도 사지 않았다. 아이스팩을 예전처럼 계속 구입한다면 그만큼 매장에서 판매하는 제품 가격에도 영향을 미치기에(관리비가 오르기 때문), 조합원의 소비 비용도 늘어나게 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소비 가격, 생활 가격을 낮추는 데도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도 사무처장은 이어 진주텃밭만의 또 다른 노력 사례인 ‘환경분담금 제도’를 설명했다. 환경분담금 제도는 매장 내에서 비닐팩(생분해비닐 포함) 또는 종이봉투를 사용할 시 환경분담금 50원을 부과하는 제도로, 적립되는 환경분담금은 진주텃밭의 친환경농민 지원 및 환경교육 비용으로 쓰인다. 매장 한 켠엔 환경분담금 50원 부과를 언급하며 ‘불편하시더라도 용기를 들고와 주시고 재활용 신문지를 활용해주세요’라고 쓰인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이상과 같은 진주텃밭의 실천은 어떤 성과를 낳았을까. 진주텃밭의 무포장 판매 탄소 저감량 측정에 따르면, 2020년 157kgCO2(줄어든 탄소량을 무게로 환산한 단위)이었던 저감량은 지난해 555kgCO2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진주텃밭 매장에서의 판매 물량은 2020년 1만5,194개에서 지난해 5만4,015개로 늘어났음에도 탄소 저감량은 늘어난 것이다.

무엇보다 조합원들 스스로 ‘농산물 무포장 판매’ 과정을 함께함에 따른 자부심 및 생활의 변화가 두드러졌다는 게 가장 큰 성과다. 2020년 녹색실천매장 전환 직후 진주텃밭에서 조합원 2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합원의 97%가 ‘장보기 후 생활 속 비닐·플라스틱 등 쓰레기가 많이 줄었다’고, 98%가 ‘지속적으로 무포장·친환경 실천매장에서 장보기를 하겠다’고 응답했다.

“여성농민의 친환경농산물 무포장으로 팝니다”

진주텃밭 등 지역단위 대안유통조직의 포장재 감축 실험과 함께 주목할 움직임은, 농부시장 등 농민·시민이 직접 만나는 장터에서의 무포장 농산물 유통 노력이 점차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기후정의·생태농업 등을 고민하는 청년 주체들이 현장 친환경농민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농산물을 농부시장에서 무포장으로 파는 사례들도 눈에 띈다.

그 사례 중 하나로 ‘최소의 최선’ 팀의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최소의 최선 팀은 서울의 한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만난 청년들이 결성한 팀으로,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무포장 제철 과채류 소분가게’를 만들고자 준비 중이다.

이들이 세운 원칙은 △여성농민이 지속가능한 농법으로 생산한 농산물 유통 △무포장 농산물 소분 판매 △‘식(食)’을 기반으로 한 농민-매개자(최소의 최선 팀)-소비자 간 연결망 만들기 △도시 내 건강한 식문화 공동체 실험 등이다.

최소의 최선 팀은 지난 4일 여성환경연대가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차린 장터 ‘달달장’에서 처음으로 무포장 농산물 판매 부스를 차렸다. 이들은 제주도 구좌읍의 여성농민 김슬기씨가 생산한 제주햇당근, 토종 자색보리쌀, 감귤 등을 무포장으로 판매했다. 제철 채소와 과일을 맛보고 싶어도 △조리해 먹기에 지나치게 물량이 많아 작물 보관이 어려운 문제 △포장재 다량 사용에 따른 쓰레기 발생문제 △제철 친환경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운 문제 등에 시달렸던 1인 가구 청년들에게 ‘딱 필요한 만큼’ 제철 식재료를 무포장으로 판매하는 최소의 최선 팀의 부스는 주목을 끌 여지가 충분했다.

최소의 최선 팀원 남수지씨는 “일반적으로 소비자는 ‘이거 하나 주세요’, ‘몇 kg 주세요’라고 하는 데 익숙하지 않나. 우리는 무포장 농산물 판매를 통해 소비자가 각각 다르게 생긴 귤 중 ‘자신이 직접 먹고 싶은 귤’을 고르는 경험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며 “방문객들은 일상적으로 대형마트 등에서 소분해 놓은 농산물을 구입하다가, 직접 농산물을 골라 무게도 재보면서 구입하는 과정을 낯설어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새로운 소비 경험에 신기해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최소의 최선 팀은 향후 제주도 각지를 돌며 생태친화적 농사를 짓는 또 다른 여성농민들을 발굴하고자 하며, 이들의 농산물을 최대한 친환경적 방식으로 판매하고자 한다. 최소의 최선 팀은 다음 달 2일 서울 망원동 ‘알맹상점’에서 ‘제주 농산물 무포장 소분 부스’를 열 예정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