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지심·측은지심이란 서책에만 있는 것입니까?”

  • 입력 2023.10.08 18:00
  • 수정 2023.10.20 09:54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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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봄은 찾아왔건마는(1866)

“네 이놈! 굴비를 내오라 한 지 언젠데 여적지 말이 없느냐?”

회갑연에 모인 사람들 이목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회갑을 맞은 이는 호서의 비인에서 현감을 역임하고 이조정랑까지 지내다 낙향한 처지로 명망을 얻고 있는 눈치였다. 잔치에는 친인척 말고도 행세깨나 한다는 양반네가 두루 참석하였고 소리꾼까지 합세하여 흥겨운 분위기가 종일 끊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기창은 아들 병호를 데리고 참례하였으며, 회갑을 맞은 이는 촌수가 먼 처가의 어느 인사였다. 그날 병호는 기창의 뜻을 따라 어떤 이에게는 큰절을 하고 누구에게는 반절을 한 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그때 대청마루의 도포짜리가 가노를 불러 나무라는 소리가 하객들 이목을 끌었다.

“예, 예. 마침 굴비가 떨어져 사람이 달려갔습니다.”

토방에 시립한 떠꺼머리 녀석이 주인에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저런 주리를 틀 놈…… 장이 예서 천 리나 된다더냐?”

굴비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지 양반의 목소리가 커졌다.

“제가 직접 달려가겠습니다요.”

“저노무 주둥빼기를…….”

양반은 버선발로 뛰어내려 떠꺼머리의 뺨을 후려갈겼다. 언성을 높일 때 체면은 깎인 것이니 차제에 기강이라도 잡으려는 듯하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바닥에 엎드린 떠꺼머리가 비 맞은 생쥐 꼴로 몸을 떨었다. 잔칫집이 서늘해졌고 대청마루의 하객과 마당의 인사들은 누구 하나 토방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꾸짖는 양반의 체면을 고려하는지 나서는 자가 없었다.

“저 사람은 잘못이 없는데 어찌 체통만을 따지십니까?”

그때 들려온 말을 따라 사람들 눈동자가 한곳에 몰려들었다. 마당 귀퉁이에 차돌맹이 같은 녀석이 섰는데 눈빛이 방자하고 말버릇이 맹랑하였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이야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서책에만 있는 것입니까? 그깟 서책이 만 권이면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자리에 가 있던 기창이 달려와 병호를 잡아 앉히며 양반네에게 허리를 숙였다.

“허허, 이런 봉욕이 있나?”

따지고 자시고 해봐야 점점 궁색할 뿐 아니라 수습할 계제도 지나버려 도포짜리는 여러모로 난처한 지경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어른도 아니요, 이제 막 털을 가는 중닭의 처지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기창의 태도가 활로를 열어준 꼴인데 쩝 입맛을 다신 도포짜리는 토방을 내려와 그예 대문 밖으로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주인이 흘린 발막신을 들고 떠꺼머리가 뒤를 따라갔다.

“장재로다!”

어디선가 그 소리가 들려왔으나 기창은 잔만 비웠다. 장내의 활기가 살아나자 그가 아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 경솔함이 사람을 잡았구나. 저 녀석은 오늘 다리몽댕이가 부러질 것이다.”

화톳불을 쓴 듯 병호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런 아들에게 기창은 돌아가자 일렀다. 그때 도포 차림에 흑립 쓰고 수염이 가지런한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살집이 없어 강팔라 뵈는 얼굴에 어깨가 비스듬한 선비였다.

“뵙기를 청합니다. 금구에서 온 진사 송문규입니다.”

허리를 굽히는 그에게 반절을 하면서,

“고부 진선마을 전기창입니다. 좌정하시지요.”하고 기창은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금구의 송진사라면 경서를 읽거나 과거를 준비하는 인근 서생들로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퇴계집』을 읽어 뜻을 세운 후 한 번 대과에 낙방하고는 한사코 한사(寒士)로 머물며 학문에 전념한다는 인물이었다. 기(氣)에 비하여 리(理)의 우위를 주장하던 호서의 임헌회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리기(理氣) 논쟁을 벌인 사실도 소문이 나 있었다. 잔에 입술만 댄 송진사가 병호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꾸중 때문에 주눅 든 아들에게 기창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밝을 병(炳)에 호경 호(鎬)를 써서 병호라 합니다.”

“혹여 경서를 읽었더냐?”

송진사의 그 질문에는 기창이 답변하였다.

“사서와 경서를 조금 가르쳤으나 이치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아이를 맡겨주시지요. 힘닿는 데까지 가르치겠습니다.”

기창은 병호를 향해 물러나 있으라고 턱짓하였다. 병호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를 두고 섰다.

“호의는 고마우나 가세가 기울어 여력이 없습니다. 그저 곁에 두고 눈이나 틔워주렵니다.”

“설경(舌耕)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경을 읽고 논할 뿐입니다. 약간의 전답이 있기로 곡식 걱정은 없이 살지요.”

“하지만 어찌 그런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저 아이는 과거에 들어 집안을 일으킬 것입니다. 맡겨주시지요.”

그 말에 기창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당장은 답변을 듣기 어렵다고 보았는지 송진사는 잠시 머무르다 돌아갔다. 우두커니 앉아 몇 잔 더 비운 기창은 처족에게 치하의 말을 전하고 병호를 일으켜 잔칫집을 나섰다.

그날 일을 어머니 인동장씨에게는 입도 벙긋 않더니 사흘 후 기창은 의관을 차리고 출타하여 밤이 이슥해서 돌아왔다. 어머니 장씨와 조용히 말을 주고받던 그는 병호를 불러 송진사를 찾아 글공부를 하라고 일렀다. 금구 종정마을까지 매양 오갈 수는 없으니 수류면 이모할머니 댁에 기거하도록 조처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창은 태인이나 금구 어디쯤 살 집을 알아보겠다 하였다.

이튿날 몇 가지 물품을 꾸려 할머니 장씨에게 큰절로 작별한 병호는 기창을 따라 집을 나섰다. 진선마을을 나와 부자는 화호나루에서 동진강을 건너고 승방산 아래 논길을 따라 들을 가로질렀다. 논은 쟁기질이 끝나 뒤집힌 흙바닥이 보이기도 하고 보리 베기에 여념 없는 곳도 있었다.

그들이 잰걸음으로 태인 지경을 벗어날 무렵 이상한 정경이 눈에 띄는데 반쯤 벤 보리밭에 낫이 버려져 있고 보리 이삭도 볼썽사납게 흩어져 있었다. 버려진 낫의 숫자로 보아 일곱 사람이 일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뭔가 사달이 나지 않고는 추수하던 농군들이 그렇듯 종적을 감출 리 만무하였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솥튼재 바깥에서 철릭을 걸친 군관이 나졸과 함께 내왕하는 사람을 기찰하고 있었다.

“종정마을로 가는 길인데 무슨 일입니까?”

“어디 손바닥 좀 봅시다.”

낡기는 하였으나 창의에 흑립 차림이라 군관은 기창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손금을 보려고 기찰을 한단 말이오?”

벙거지를 쓴 나졸이 대신 설명하였다.

“원님 후실께서 행차를 하는데 추수하던 자들이 돌팍을 던졌다지 뭡니까? 몇은 잡아들였는데 나머지가 오리무중이라 이러구들 있수.”

기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바닥을 보자는 연유는 잘 알았소. 헌데 원님도 아닌 첩실 행차에 돌을 좀 던졌기로 기찰을 한단 말이오? 논에 돌멩이가 있을 리 없으니 흙부스러기나 던졌겠구만.”

“말이 수상쩍습니다그려. 원님의 내실 행차에 돌을 던지면 잘한 일입니까? 호패 좀 봅시다.”

군관이 언성을 높이며 손을 내밀었으나 기창은 버티고 서서 뻐시게 쳐다보았다. 가슴이며 허리와 허벅지가 얼마나 실한지 오 척 단구라도 그는 밭고랑에 세워둔 깍짓동 한가지였다. 더욱이 이마가 도드라져 송곳으로 후빈 듯한 눈을 위로 치뜨자 들판에 꽂히는 번개처럼 섬광이 일었다. 그러나 지금은 송진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요, 아들과 동행하는 길이었다. 호패를 건네받은 군관이 앞뒤로 살피더니 병호의 손에 들린 꾸러미를 가리켰다.

“손에 든 건 무어요?”

“아이의 스승에게 드릴 약재올시다.”

“풀어보아라!”

군관이 뒤에 선 나졸에게 이르자 기창이 이죽거렸다.

“웅담이 들었거든 주워 자시려오?”

“말이 점점 불손해지는구려. 곤장 맞고 구더기를 파면 곧장 골로 가는 겝니다. 어서 풀지 않고 무엇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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