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동학혁명이 필요한 시대, 우리가 전봉준”

인터뷰 l 신작「이양선」으로 돌아온 이광재 소설가

  • 입력 2023.09.24 18:00
  • 수정 2023.10.10 10:34
  • 기자명 김수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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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윤석열정부의 역사 인식이 문제로 떠올랐다. 지난 3.1절 기념사에 이어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그렇다. 104주년 3.1절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 “불행한 과거”, “부끄럽고 슬픈 역사”(대통령 기념사)로 표현됐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당당한 역사는 배제됐다. 소모적 이념 논쟁을 불러온 홍범도 장군의 흉상 문제에서도 객관적 사료와 학계의 정설마저 무시됐다. 국가 최고지도자마저 역사를 부정하고, 자기 필요에 역사를 이용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리 근대사를 ‘부끄럽고 슬픈 역사’로 보는 건 정당할까.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을 탐구해 온 이광재 작가의 시선으로 보면, 단연코 아니다. 식민지의 수난은 못나서 당한 ‘부끄럽고 슬픈 역사’가 아니다. “부자를 자처하면서도 약한 나라를 침략해 약탈”한 세력(서양과 그에 편승한 일본)의 범죄일 뿐이다. 기후위기를 비롯해 현재의 모든 위기도 불러왔다. 그렇다면 국권 상실은 “부끄럽고 슬픈(윤석열의 말)” 게 아닌 “몰아내고 맞서 싸워야(이광재의 말)”할 사태가 된다. 그 싸움의 중심엔 농민이 있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폭력이 극에 달해 지구별의 뭇 생명들이 신음하지만, 최고지도자는 국민의 역사적 자존감마저 깔아뭉개는 지금. <한국농정>은 일찍이 새 세상을 제시했던 동학사상을 뿌리 삼아 농민혁명의 주역으로 성장해 나갔던 조선 청년들의 여정을 담은 신작 소설「이양선」을 1061호부터 연재한다. 이에 앞서 지난 18일「이양선」을 쓴 이광재 작가를 만나 ‘동학’과 ‘농민’에서 발견한 이 시대의 실마리를 물었다.

동학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나온 평전 <봉준이, 온다>는 그가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전봉준을 수년간 ‘뜨겁게’ 탐구한 결과물이다. 동학 연구가 일천한 역사학계도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객관적 평전은 문학으로 나아갔다. 그는 3년 뒤 동학농민혁명과 그 주역들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장편소설 <나라 없는 나라>(2015년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를 써냈다.

26살 비교적 이른 나이에 등단했지만, 삼십 대를 건너는 내내 긴 숨 고르기에 들어갔던 청년 작가 이광재. 그는 2005년 동학농민혁명 연구자 최현식(1923~2011년, <갑오동학혁명사> 저술)의 자서전 발간 작업에 나서며 전봉준을 만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동학에 매료됐다. 불혹을 넘긴 때였다. 전봉준과 동학의 무엇이 불혹을 넘긴 사내를 뜨겁게 만들었을까. 들어보자.“

“다 같이 죽음으로 달려갈 건가, 여기서 멈출 건가”
서구 문명의 위기, 엄중한 문제의식으로 맞서야

소설가 이광재. 한승호 기자 
소설가 이광재. 한승호 기자 

「이양선」은 어떤 내용인가?

이양선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은 고민했다. 이들은 유교 이데올로기는 근사하지만, 신분제 등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하는 유교를 더는 안 되겠단 생각을 당연히 했을 거다.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속에서 서구의 책들을 읽고 토론하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전 지구를 장악하고 현재도 관철되고 있는 서구 기독교 세계관에 동학은 맞서 대항한다. 무위이화(無爲而化,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짐. 자율의 우주법칙)라는 기본사상에서 불연기연(不然其然,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다는 뜻. 1863년 최제우가 지은 글. <동경대전>에 실려 있으며 사회 규범이나 자연현상, 일상적 현상의 궁극적 실재가 무엇인지 불연기연의 논리로 묻는다)이란 인식론을 어린 동학군들이 어떻게 자기 세계로 받아들이는지, 이를 통해 어떻게 이양선에 대응할지를 고민하는 내용이다. 이양선은 장차 지구를 휩쓴 자본주의, 제국주의, 근대이성, 합리성, 과학기술 등을 상징한다. 이 체제는 이제 인간종마저 끝장낼 기세다. 우리는 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쉼 없이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데, 이 고민을 일찌감치 수행한 인물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었다.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송희옥 등이 그들이다.

10년간 공백이 있었다. ‘무엇으로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뜨거워질까’라는 고민을「봉준이, 온다」에 썼다.

침잠의 시간이었다. 단절됐다 나오면서 기존에 품었던 생각을 뒤엎고 새로 나아가고 싶었다.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부단히 고민했다. 그때 동학의 세계와 만났다.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다. 내 세계를 더 확장하고 더 깊이 끌고 들어가 이야기할 거다. 요새 역사가 ‘퓨전’이나 소재로서 자주 다뤄지는데 너무 가볍다. 세계가, 우리 삶이 그렇게 가볍나? 보면 내 삶은 항상 무겁더라. 항상 고민이 많고. 그렇게 쓰고 싶진 않다. 역사를 보여주려면 당시 상황을 충분히 공부해야 하고, 당시의 다양한 결들을 다뤄야 한다. 글쓰기는 내 싸움의 방식, 수양의 방식이다.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에 이르는 게 목표다. 팔리냐 안 팔리냐는 다음 문제다. 자기 마음에 가장 들어야 한다. 그랬는데 팔리기까지 하면 더 좋지 않겠나. 모든 작가의 소망일 거다. 작가들이 좀 더 치열했으면 한다.

빠져든 게 왜 하필 동학인가?

이젠 더 이상 저들(서양)의 뒤나 따라다니는 방식은 안된다. 자기 것을 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 방식에 대한 탐구의 끝이 결국 동학이었다. 우리 풍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관점에서 동학을 바라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차곡차곡 쌓여온 우리 정서, 문화는 모두 농민에게서 나왔다. 노동자나 과학기술은 지금의 주류일 뿐이다. 우리 문화의 토양은 전부 농민이 만든 거다. 2,000년 전엔 유목이었다. 우리에겐 고구려다운 피가 있다. 그 뒤론 농경문화다. 그러니 이에 주목하지 않고선 우리 것을 내놓을 수 없다. 농민적인 것이 집약된 것이 동학이라고 봤다. 동학은 조선 후기 지식인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면서 10년간 세상을 주유하며 가장 많이 만난 존재가 농민이다. 여기에 재가녀의 자식으로 무과시험밖에 응시할 수 없었던 최제우의 무과적 조예가 결합해 당시 서생들처럼 학문적 문제의식으로만 끝나지 않았던 거다.

그래도 지금 동학은 낯설다.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할까?

동학의 슬로건은 척양척왜다. 부자라면서도 약한 나라를 침략해 약탈해 간 세력을 ‘척양’, 몰아내야 한다는 거다. 일본도 이미 한편(왜양일편)이 됐으므로 척왜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은 단지 탐관오리를 없앤 것만이 아닌, 세계를 덮쳐오는 근대 서구와 자본주의 세력과 한판 붙은 거다. 작게는 보국안민, 크게는 척양척왜로 그들과 붙었다. 조병갑(고종 때 탐관, 고부군수)이 수탈했다고 전봉준을 조병갑의 맞수로만 보면 안 된다. 그러면 동학이 너무 좁아진다. 우리 세대는 1980년대 중반에야 겨우 반미를 외쳤다. 그러나 동학농민들은 ‘이 세계에 큰일 날 시스템이 도래했다. 저것들과 싸워 부수지 않으면 이 세계는 난리가 날 거다’라고 이미 예언했다. 작은 운동이 아닌 큰 틀에서 해석해야 한다.

큰 틀이란 뭔가?

동학의 기본 사상이자 제1 열쇠말은 무위이화다. 이 세계는 하는 것 없이 저절로 이뤄졌다는 거다. 우주의 창창한 기운이 순환하며 생명이 싹텄다, 스러지고 다시 싹트며 생명의 기운이 만들어지는 세계관이다. 우리 인간은 저 나무와 다르지 않다. 우주의 기운 속에서 생겨나 잠깐 존재하다 스러지는 어느 한 점일 뿐이다. 우리가 우월하지도 않고 단지 사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생명의 역할에 따라 나무는 붙박여서 살아가고 우린 움직이며 살게 구성된 거다. 그러니 우리가 최고라고 깔아뭉개면 되겠나. 이와 달리 서양의 절대권력, 최고 신에겐 우리 이외를 다 쓸어버리라고 기도한다. 이게 제국주의의 본성이다. 수운(최제우, 동학의 창시자)부터 해월(최시형, 동학 제2대 교주), 손병희(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제3대 교주) 모두 이 세상 생령을 가진 모든 것이 하늘이라고 했다. 이러한 세계관이 위대한 지점이다. 우리는 이미 150년 전에 이런 세계관에 도달했다. 증산교, 대순진리교, 보천교, 원불교, 하다못해 사이비 종교도 다 거기에서 내려왔다. 우리 현대사상의 뿌리다.

이광재 소설가는 "세계의 주인은 뭇 생명이다. 그걸 가장 잘 구현하는 게 농업과 유목이다. 우주의 기후, 절기 따라 농사짓고, 풀 돋아나면 양떼 몰고. 이 둘 빼곤 지구상에서 ‘쓰잘데기’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두 우주 순리를 거스르는 거다. 세계의 주인은 농민"이라고 강조했다. 한승호 기자
이광재 소설가는 "세계의 주인은 뭇 생명이다. 그걸 가장 잘 구현하는 게 농업과 유목이다. 우주의 기후, 절기 따라 농사짓고, 풀 돋아나면 양떼 몰고. 이 둘 빼곤 지구상에서 ‘쓰잘데기’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두 우주 순리를 거스르는 거다. 세계의 주인은 농민"이라고 강조했다. 한승호 기자

지금 우리에게 동학이 주는 메시지는?

이양선이 상징하는 건 지금껏 지구를 분탕질해 놓은 저 서양의 근대이성이다. 이를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는 문제의식이 150년 전부터 있었던 거다. 수운의 언어인 보국안민과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의 척양척왜로 이미 싸움은 시작됐다. 이 세계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의식을 갖길 바란다. 이대로라면 지구는 망한다. 약한 종부터 소멸할 것이고, 인간 중에도 약하고 돈 없는 이들부터 소멸할 거다. 다 같이 죽음으로 달려갈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 과학기술로는 해결할 수 없다. 과학기술도 서구의 문제의식과 같다. 과학은 여기의 중력체계가 미치는 범위 내에서만 참이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은 이미 자본에 포획됐다. 과학기술은 곧 자본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겠나. 이를테면 AI, GMO를 멈춰야 한다. 우주가 하는 일을 인간이 하려는 것이 서양의 논리다. 인간을 하느님 자리에 놓고 하느님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더 큰 동학혁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전봉준이 돼 싸워야 한다. 서구의 세련미, 서구적 미학에 젊은이들이 철저히 포획돼 있다. 주식에 올인하면서 서구적 산업양식, 경제양식에 철저히 종속됐다.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 싸움을 농민들만 하고 있다. 나는 글로 싸운다. 당신들은 기사로 싸우는 거다. 내가 글을 쓰는 배경이다. 작가들이 더 분투해야 한다. 앞으로 현대 소설을 쓰더라도 동양적 세계관의 문제의식을 담을 것이다. 서구 근대이성에 포획되지 않은 인물들, 그들이 더 도달해야 할 지점을 문학으로 구현하겠다. 동양 세계관은 남을 어떻게 해서 내가 잘되겠다는 게 아니다. 저쪽(서양)이 그렇다.

동학 당시엔 농민이 절대다수였지만, 지금은 너무 적고 늙었다. 농민은 지금 많이 힘들다.

아니다. 농민들은 힘이 있다. 아직 살아 있다. 조직된 힘이 있다. 자기 고유의 생활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막걸리 한 잔이라도 이웃을 불러 나눠 먹는다. 세계에 감사함을 표하는 거다. 그런 삶을 지키며 세계를 고민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가. 필요하면 나가 싸우기도 한다. 일전에 전봉준 투쟁단(2016년 11월 일단의 농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며 트랙터 수십여 대를 몰고 전남 해남에서부터 상경 투쟁)으로 트랙터를 몰고 나온 농민들을 우린 봤잖나. 세계의 주인은 뭇 생명이다. 그걸 가장 잘 구현하는 게 농업과 유목이다. 우주의 기후, 절기 따라 농사짓고, 풀 돋아나면 양떼 몰고. 이 둘 빼곤 지구상에서 ‘쓰잘데기’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두 우주 순리를 거스르는 거다. 세계의 주인은 농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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