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서 ‘대안’ 모색하는 주체적 인간, 여성농민

  • 입력 2023.08.25 09:20
  • 수정 2023.08.27 21:02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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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 7월 12일 강원 홍천군 영귀미면의 깨밭에서 한 여성농민이 들깨 모종을 심던 중 허리를 펴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7월 12일 강원 홍천군 영귀미면의 깨밭에서 한 여성농민이 들깨 모종을 심던 중 허리를 펴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촌에서 농사짓는 일 자체가 고난인 시대, 여성농민은 ‘더 어려운 농사’를 지으며 농업의 대안을 모색한다. 농사를 마친 뒤 가정에선 여전히 제대로 된 사회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는 ‘가사노동’을 해야 하며, 그러다가도 세상이 그들을 찾을 땐 그들이 품은 ‘대안’을 외치고자 도시 아스팔트 위로 달려간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주체적 인간,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있을까?

지난 19~20일 경북 상주시 이안면 ‘상주다움 서울농장’ 교육장에서 한국농촌사회학회·상주다움사회적협동조합·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주최로 진행된 ‘젠더와 농촌사회 2023 워크숍’은 한국 농촌사회 내 여성농민이 겪는 불합리한 상황, 이에 굴하지 않고 대안 실천을 멈추지 않는 여성농민의 주체성 등을 탐구하는 자리였다.

기후위기 속에서 오히려 ‘대안적 실천’ 강화하는 여성농민

지난 19~20일 경북 상주시 이안면 ‘상주다움 서울농장’ 교육장에서 한국농촌사회학회·상주다움사회적협동조합·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주최로 진행된 ‘젠더와 농촌사회 2023 워크숍’
지난 19~20일 경북 상주시 이안면 ‘상주다움 서울농장’ 교육장에서 한국농촌사회학회·상주다움사회적협동조합·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주최로 진행된 ‘젠더와 농촌사회 2023 워크숍’

이날 김신효정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부소장은 기후위기로 여성농민의 농사환경과 생존권이 점차 악화되는 가운데, 오히려 더욱 ‘대안농법’ 실천에 나서는 여성농민들의 사례를 이야기했다. 김신효정 부소장은 2020년 11월과 2021년 4월 두 차례 상주시 B마을 Y여성농민공동체를 방문해 여성농민 12명과의 심층면접을 진행한 바 있다.

김신 부소장은 “대개 농사의 성별분업으로 인해 밭농사를 주로 담당하는 여성농민은 기후변화에 따른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며 “여성의 생산노동은 증가하는 반면 생산량은 줄어드는 이중고의 상황에 놓여있고, 여성농민에게 예측 불가능한 기후위기는 다층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김신 부소장이 만난 농민 A씨는 고추 500포기를 심은, “암만 못 따도 120근 따”던 밭에서 고추를 3근밖에 못 땄던 경험을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기후위기로 인한 생존권 악화가 두려우면서도, 여성농민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대안농업, 즉 다양한 생태적 농법(예컨대 농생태학)을 시도했다는 게 김신 부소장의 설명이다. 그가 만난 농민 B씨는 농사 과정에서 비닐 사용을 완전히 중단하고 풀 멀칭을 통해 토양과 작물이 가뭄·장마에 버텨내는 힘을 스스로 키워내는 걸 발견했다.

Y공동체 여성농민들은 기후변화에 대응할 생태지식을 새로이 구축하려는 실험을 계속했다. 특히 여성농민이 농지의 ‘흙’과 만나며 생태지식을 구축하던 사례로서, 김신 부소장은 상주 농민 C씨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흙 만지면 촉감이 엄청 좋아. 맨발로 다녀봐도 촉감이 엄청 좋아. 흙이 살아있는 흙… 농약 친 지 얼마 안 된 논에 발을 넣으면 닿기만 해도 따끔하던지… 이거 유기농은 흙탕물이지만 손만 대충 씻어도 먹을 수가 있고….”

실제로 농생태학 실천 과정에서 흙이 훨씬 보드라워지고 깨끗해진다는 증언은 상주·부여 등 실천현장 곳곳에서 제기된 바 있다.

김신 부소장은 결론에서 “여성농민운동의 생태적 전환 과정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 문제에 있어, 현재의 여성운동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공한다”며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국가를 넘어선 초국적 연대와 더불어 새로운 여성운동의 출현이 시급히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장 양옥희)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대안농업으로서 농생태학 실천, 토종작물 보전·재배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비아캄페시나와의 연계를 통한 ‘초국적 실천’에도 열심이다.

‘일 아닌 일’ 농촌 가사노동, 이젠 ‘노동’으로 인정해야

여성농민의 노동은 농지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정에선 가사노동이라는 ‘일 아닌 일’이 기다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박지은 한국농촌사회학회 운영위원은 “농촌 가사노동은 기계노동을 제외한 나머지 노동을 관리하거나 직접 수행하는 역할임에도, 고용이나 상품화 가치를 기준으로 논의하는 노동 개념에서 배제된다”고 지적했다. 농업과 가사노동이 함께 이뤄질 때, 가사노동은 농업의 ‘하위노동’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박 운영위원은 “농촌여성은 하루종일 일하다가 잠시 자고 일어나 다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농번기, 제사 등의 시기에 잠자는 시간이 2~3시간인 경우도 많아, 노동시간이 몇 시간인지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업 중단 개념’이 거의 없이 생활한다”고 밝혔다. 정작 그럼에도 여성농민의 기여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게 박 운영위원의 주장이다.

박 운영위원은 농촌 가사노동을 ‘특정 성별에게 부과하는 도덕·의무’가 아닌 ‘노동’으로서 재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운영위원은 “2011년 국제노동기구(ILO)는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노동 3권을 적용받는 노동자로 인정했지만, 이러한 일은 국내에서 공식 일자리로 제도화되지 않고 있다”며 “가사 관련 직종은 농가도우미·경로당도우미 등 각종 ‘도우미’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농촌 가사노동자가 노동자 지위를 갖고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다면, 농촌에서 여성의 장기거주를 유도하는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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