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찰나의 순간

  • 입력 2023.05.01 00:00
  • 기자명 장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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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

농산업에서 유통·식품으로 담당 지면을 바꾼 후 처음으로 가락시장 경매 현장엘 다녀왔다. 배추 하차거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달 19일 늦은 밤 11시 경매시간에 맞춰 가락동으로 향하는 길은 주차장과 다름없는 평소와 다르게 이질적일 만큼 뻥 뚫려 있었고, 수원서 1시간 30분 남짓 소요되던 가락시장까지의 여정은 5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허전한 도로를 떨리는 마음으로 내달린 결과 시장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시장과 가까워질수록 대형 화물차들이 즐비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경매 첫 관람을 목도에 둔 기자의 긴장감을 배가시켰다.

게다가 경매장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지게차와 각종 운반차, 오토바이에 대형 화물차까지 얽히고설켜 정신을 쏙 빼놓았기 때문이다. 와중에 경매장은 생각보다 훨씬 넓어 때아닌 달밤의 운동을 하게 만들었고, 어렵사리 찾은 도매법인의 배추 경매장에선 음의 높낮이도 없이 주문을 읊는 듯한 경매사의 말과 낙찰을 알리는 기계음이 쉴 새 없이 귀에 꽂혀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웠던 건 키 높이만큼 높게 쌓인 배추 팰릿이 단 몇 초라는 찰나의 순간, 경매된다는 사실이었다. 현장에선 경매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띵동’하는 낙찰 알림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농산업 분야를 6년간 취재하며 농산물 가격 결정 구조의 불합리함에 대해 토로하는 농민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 봤지만, 단 몇 초 만에 결정되는 경매 현장을 직접 보니 농민들의 심정이 단숨에 이해됐다.

밭을 고르고 씨를 뿌려 모종을 키우고, 그걸 본답에 심은 뒤 물 대주며 몇 개월간을 가꾼 농작물을 출하할 때 (멋쩍어서인지 대개는 본인이 키운 농작물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놓진 않지만)생산비가 보장되는 일정 수준 이상의 가격을 받으리란 기대감이 농민들 마음 속에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무색하게 물리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서울 도심 한복판 가락동의 시장에서 찰나의 순간을 거치며 가격이 결정된다는, 다소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날 반입되는 물량과 구매자의 구매 의향에 의해 크게 등락을 반복하는 농산물 경매 현황을 훑어보고 있자니 농사짓는 게 도박과도 같다는 농민들의 한숨 섞인 말이 귀에서 맴도는 듯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을 위해 온라인 도매시장 개설을 내건 바 있다. 하지만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이 제값으로 거래되기 위해선 경매 의존적인 유통에 ‘혁신’이 필요할 듯하다. 온라인 도매시장에서도 대부분의 농산물은 경매를 통해 거래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한 전문가의 말처럼 경매 장소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경매제도 그 자체가 가진 이점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노동자가 일한 결과를 월급 등으로 보장받듯이 농민들이 흘린 땀방울 역시 그 가치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도록 농작물 가격 결정 구조가 다양화되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단상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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