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기본권 위기 한가운데서 먹거리운동을 성찰하다

  • 입력 2023.03.26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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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달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범친환경농업계와 먹거리운동단체 회원들이 윤석열정부가 전액 삭감시킨 임산부 친환경농산물 지원사업 예산과 초등돌봄교실 과일간식 지원사업 예산의 복원을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범친환경농업계와 먹거리운동단체 회원들이 윤석열정부가 전액 삭감시킨 임산부 친환경농산물 지원사업 예산과 초등돌봄교실 과일간식 지원사업 예산의 복원을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먹거리기본권의 위기 속에서, 우리 사회 전체에 국산·지역산·친환경 먹거리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노력해온 먹거리운동진영 내의 위기의식도 최고조에 달했다.

지난 21일 서울 삼성동 한살림연합 지층 회의실에서 전국먹거리연대·환경농업단체연합회 공동주최로 열린 ‘윤석열정부 친환경농업과 먹거리운동, 길을 묻는다!’ 토론회는 친환경농업·먹거리운동 진영의 내부성찰 목적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토론회에서 나온 이야기, 그리고 최근 만난 먹거리운동 주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한데 모아, 현 시점의 먹거리운동진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진단해 본다.

“왜 분노하지 않고, 왜 싸우지 않았나”

토론회에서 권종탁 전국먹거리연대 집행위원장은 지난해 윤석열정부가 들어선 이래 악화된 정세를 이야기했다. 먹거리기본권 관련 예산 약 230억원이 전액 삭감된 상황, 존폐위기로 몰린 서울시 도농상생 공공급식 사업에 대한 상황 설명과 함께, ‘민·관 협치’ 명목으로 먹거리운동 시민사회 측에 손은 내밀었던 문재인정부와 달리, 윤석열정부는 그 손을 거둬들이고 먹거리정책 영역에서도 철저히 ‘일방통행’ 중이라는 게 권 집행위원장의 진단이었다.

정부가 이러니 지자체도 협치 기조를 내려놓고 있다. 권 집행위원장은 “서울시는 도농상생 공공급식 사업과 관련해 그 어떤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업내용 변경’ 기조를 유지 중이고, 그 밖에 지역 먹거리계획 실천을 위해 수립된 예산조차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지자체, 먹거리정책 설계를 논의하려고 찾아가는 사람을 만나주지도 않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 집행위원장은 “작금의 상황은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이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양대 먹거리기본권 예산 약 230억원이 최종 삭감된 것을 목도하며, 민간과 행정이 부딪칠 때 그 사이에서 중재해야 하는 의회 권력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고, 왜 싸우지 않는 걸까. 시민에게 우리 이야기를 더 잘 하기 위한 노력, 시민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그러한 노력을 강화해야겠다. 지역 먹거리연대, 먹거리운동단체들이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예산 집행을 위해 노력하고, 민·관 협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편 익명의 한 인사는 “문재인정부 시기 먹거리운동 과정에 대해서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민·관 협치를 구실 삼아 시민사회 주체들을 ‘체제 내’로 포섭시키는 과정이 있었고, 그 주체 중 일부는 그 ‘체제 내’에서 안주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라며 “현 윤석열정부 시점에서 투쟁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후 다시 들어설 가능성이 있는 ‘민주당 정부’에서 다시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성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장 시급한 과제, ‘의제의 확장’

앞길이 불투명할 땐 과거의 성과 또는 실패로부터 교훈을 찾는 것도 앞길을 헤쳐가는 방법이 된다. 2000년대 초반, 먹거리운동진영은 학교 학부모들과의 연대로 “아이들에게 건강한 친환경먹거리를 먹이자”는 취지 아래 ‘친환경 무상급식 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바 있다.

당시의 성공요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의제의 확장’과 ‘연대의 폭 넓히기’. 집에서 도시락 싸서 등교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친환경먹거리로 만든 급식을 무상으로 제공하자”는 구호는 설득력을 가졌고, 이 구호에 공감하는 전국의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학교급식 운동에 뛰어들었다.

20여년이 지났다. 학교에서의 친환경 무상급식은 그때와 비교하면 ‘상식’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 바깥’엔 넓고 넓은 먹거리기본권 사각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농업 및 먹거리기본권을 위협하는 새로운 요인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해, 윤병선 건국대 교수는 “현재 먹거리운동진영의 가장 큰 과제는 ‘의제의 확대’, ‘다루는 내용의 확대’다. 운동주체들의 연대 강화도 중요하지만, 의제의 확대를 통한 새로운 논리 개발이 더욱 시급하다”며 “농민권리의 관점과 생태적 관점, 갈수록 늘어나는 취약계층의 먹거리기본권 실현에 대한 관점을 확고히 하면서, 지금 우리의 농업과 먹거리를 위협하는 각종 요인에 대해 연구하고 대응논리와 의제를 개발하는 것이 너무나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농업과 먹거리를 위협하는 각종 요인’으로는 오랫동안 먹거리운동진영에서 대응해 온 유전자조작먹거리(GMO) 문제와 함께, 푸드테크·기후스마트농업 등 자본의 주도로 개발되는 새로운 ‘산업 영역’ 등이 해당된다. 그러나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위협요소에 대해, 아직 먹거리운동진영 차원의 연구 및 논리 개발은 충분치 않은 게 사실이다.

윤 교수는 “단순히 ‘연대체’에 참가단체를 늘리는 것 이상으로, 새로이 개발한 의제를 기반으로 기후정의운동 주체 등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를 고민하는 또 다른 주체들과의 연대 강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현례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상임이사는 21일 토론회에서 “우리가 늘 정부 부처의 ‘칸막이’ 문제를 지적해 왔지만, 그동안 먹거리운동진영 또한 우리끼리 너무 머리를 맞대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먹거리는 먹거리끼리, 기후정의는 기후정의끼리, 이렇게 ‘칸막이 운동’을 하고 있다. 이를 극복해 새로운 의제를 갖고 폭넓게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사자’와 함께하는 운동

장현례 상임이사는 “언젠가부터 먹거리운동 과정에서 ‘당사자’가 빠졌던 건 아닌지 자문해보자. 늘 목소리를 내왔던 사람들끼리 내고, 정작 먹거리기본권을 누릴 당사자는 운동 과정에서 빠진 것 아니냐는 뜻이다”라며 “예컨대 임산부 친환경농산물 지원사업 예산 복원 시도 과정에서 ‘당사자’인 임산부의 이야기가 더욱 많이 나오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지적했다.

‘당사자와 함께하는 운동’의 필요성은 서울시 도농상생 공공급식 사업의 위기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도 거론됐다. 한 자치구 공공급식센터 관계자는 “어린이집 원장, 복지시설 센터장 등 도농상생 공공급식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위기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함께하는 과정이 충분치 않았다고 본다.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강할수록 서울시와 자치구 정치인들도 이 사업을 쉽게 못 건드리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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