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소득 재분배·친환경 외쳤지만 … ‘충분’했을까

올해부터 시행된 유럽의 새 CAP, 주요내용·쟁점·전망

  • 입력 2023.03.19 18:00
  • 수정 2023.03.19 18:49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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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지난 2021년 6월 농업정책 개혁을 원하는 프랑스 농민들이 “‘앙마르슈(현 프랑스 집권당 르네상스의 구 명칭. 전진이라는 뜻)’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는 농업정책을 승인할 것인가?”라는 조소를 담은 현수막을 파리시 센 강의 한 다리에 설치한 모습. Collectif Nourrir 제공
지난 2021년 6월 농업정책 개혁을 원하는 프랑스 농민들이 “‘앙마르슈(현 프랑스 집권당 르네상스의 구 명칭. 전진이라는 뜻)’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는 농업정책을 승인할 것인가?”라는 조소를 담은 현수막을 파리시 센 강의 한 다리에 설치한 모습. Collectif Nourrir 페이스북

유럽 대륙의 농업·농촌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공동농업정책(CAP)의 최신판이 지난해 연말 최종 갱신돼 올해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각 회원국은 EU가 정한 규칙을 지키는 가운데 수립한 ‘국가전략계획’을 토대로 농정을 펼치게 되는데, CAP 내 예산 비중이 가장 큰 프랑스를 중심으로 주요 내용과 쟁점, 전망을 간추려봤다.

농가 소득의 ‘재분배’

2023~2027 CAP는 유럽 농업이 그린딜에 부합할 수 있도록 10가지 핵심목표와 세부기준을 정했다. EU가 첫 번째로 내세운 목표이자 가장 중요한 과녁은 ‘공정한 수입의 보장’이다. 농지와 생물다양성의 보존은 그린딜의 목적 달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기하급수적으로 농장과 농민이 사라지는 현실 속에 이를 지키려면 종사자들을 계속 농촌에 머물게 할 강한 지원책이 필요했다.

회원국들은 중소 규모 농장의 소득 보전을 위해 직불금 예산의 일정 부분(최소 10%)을 ‘재분배 직불’에 사용해야 하고, 청년 및 신규 진입 농민들에 대한 지원책(최소 3%)도 수립해야 한다. 재분배 직불의 경우 대개 경작 농지 가운데 해당 국가에서 ‘소규모’로 판단하는 면적까지는 ha당 높은 직불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농가당 평균 재배면적이 60ha를 넘는 프랑스가 재분배 직불 대상으로 정한 면적은 52ha로 연간 최대 재분배 직불금은 340만원이다. 이 농민이 40세 이하이며 국가가 정한 교육을 이수한 경우, 최대 5년 동안 연간 620만원의 직불금을 추가로 받는다.

각국은 직불 예산의 최대 30%를 재분배 직불에 할당할 수 있는데, 여기서 가장 성의를 보인 국가는 체코로 전체 직불 예산의 23%를 재분배 직불에 할당했으며 4ha 미만 농장에는 일시금도 지급한다. 벨기에도 19.5%라는 높은 비중을 할당했다. 과반에 가까운 농장이 1ha 미만을 경작하는 포르투갈 역시 우리나라의 소농직불금과 비슷한 형태의 추가 직불을 도입했다.

반면 프랑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는 CAP가 제시한 최저선인 10%를 겨우 채웠다. 한편 이탈리아는 대형 농장의 직불 상한을 없애는 등, 몇몇 나라들은 재분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소득 정책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활동적 농민(active farmer)’ 개념의 강화다. 활동적 농민을 정의하는 기준 역시 나라마다 다르지만 판매 영수증을 확인하거나 소유와 계약에 관한 서류를 통해 입증하고, 재해보험 가입 여부를 따지는 등의 방법은 대개 기존 체계를 활용한다. 벨기에의 경우 농업과의 겸업을 인정하지 않는 직군의 범위를 설정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활동적 농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 핵심적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재분배·청년·친환경을 포함한 기본형 직불뿐만 아니라 작목이나 가축에 따른 조건제 직불 또한 받지 못한다. 단지 겸업을 한다는 것만으로 직불제에서 무작정 배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농업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경우 직불 혜택을 주자는 취지다.

더욱 더 ‘친환경’

새 CAP는 EU 그린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는 만큼 친환경 농업 장려를 목적으로 하는 기준도 대거 마련했다. 직접 지불 예산의 25%는 반드시 친환경 직불이나 동물 복지 개선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형태로 쓰여야 하며, 농촌 개발 예산 역시 35%를 기후위기·생물다양성·동물복지 분야에 할당했다. CAP의 전체 예산은 40%가 기후 대응과 연관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각국의 계획은 이전 CAP보다 친환경 부문의 지원이 후퇴해서는 안 된다. 또 EU의 기후·환경 분야 법률이 수정되는 경우 이에 맞게 계획을 조정해야 할 의무가 부여됐다.

핵심 수혜인 관련 직불의 경우, 적극적인 유기농업을 수행하는 것 외에도 생물다양성을 위해 아예 휴경하는 선택까지도 이 직불 대상에 포함된다. 기존의 녹색 직불을 대체하는 프랑스의 ‘에코레짐’ 직불은 경작지가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하면 지급되는데, 인증받은 유기농업을 하거나(ha당 최대 15만원), 농생태적 요소를 갖추고 휴경하거나(ha당 최대 11만원), 영구초지를 운용하는 경우(ha당 최대 11만원) 직불 대상으로 판별한다.

프랑스에서 농장이 ‘유기농 전환’을 선언할 경우, 전환 결정에 따른 ‘전환 지원(CAB)’에 나서며 농장이 목표를 달성한 후에도 이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유지 지원(MAB)’의 혜택을 부여한다. 지원금이 가장 높은 채소나 과수 재배의 경우 유기농으로 전환하면 최대 5년 동안 ha당 연간 약 120만원의 전환 지원금을 받고, 유기인증을 받게 되면 ha당 약 83만원의 유지 지원금을 받는다.

CAB와 MAB는 프랑스가 지난 2015년부터 시행해온 것으로, 평균 지원 규모는 초기 상태(ha당 11만원)에서 답보하고 있으며 이는 새 CAP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포르투갈·오스트리아·벨기에·독일·체코·스웨덴 등은 프랑스보다 유기농 수행 농장에 대한 지원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큰데, 유기농지의 비중이 전체 대비 26%에 달한 오스트리아는 기본적으로 ha당 28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현상 유지’와 ‘변화’의 대결

2010년대 후반에 다다르며 기존 CAP가 유럽의 농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졌고, 프랑스·독일·스페인 등 주요국에선 CAP의 개혁을 원하는 농민·시민단체들이 각각 50개씩 모여 만든 연대체들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Collectif Nourrir(출범 당시 Pour une autre PAC)’, 독일의 ‘MEINE LANDWIRTSCHAFT’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보다 친환경적이고 생태보존적인 농업정책 수립을 주장하며 각국 정부와 EU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운동을 벌였으며, 기존의 대형 농민단체들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유럽 의회가 이들의 의견을 쉽게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날로 커가는 추세다.

새 CAP 출발을 위해 각국은 국내 농업의 상황과 농민들의 제각기 다른 요구를 고려하면서도 제시된 기준에 부합하는 ‘전략계획’을 짜 EU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는데, 이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의 주인공 역시 프랑스였다. 지난해 4월 EU 집행위원회는 이 나라의 전략계획이 ‘친환경’을 위한 목표 달성에 부족하다며 지난해 4월 초안을 거절했고, 국내외로 큰 논란이 일었다.

당시 집행위는 이 계획에 대해 재분배의 공정성 부족, 축산 부문의 배출감소 목표 부재, 물과 비료의 사용에 관한 규제 불충분 등을 지적했고 이는 관행농업을 유지하려는 집단과 생태농업을 지지하는 집단 사이의 상당한 갈등을 낳았다. 국내의 대표적 진보 농민단체 프랑스농민연맹(Confédération Paysanne)은 재분배 직불의 지급액이 두 배로 늘어나야 하고, 제초제나 화학비료에 대한 강한 규제와 거리가 먼 프랑스 정부의 HVE(높은 환경적 가치) 인증 기준도 농생태학의 관점에서 무효하다며 이를 친환경으로 간주해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9월 프랑스의 국가계획이 EU 집행위를 통과했고, 쟁점 위주로 보았을 때 초안에서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다. 이로써 연간 CAP 예산의 17%를 차지하는 가장 큰 수혜국의 농업정책은, 냉정하게 봤을 때 CAP의 새 틀에는 부합했으나 크나큰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다는 평가다. 발표 이후 관행농업 중심의 대형 농민단체들은 대체로 환영한 반면, 반대 진영에서는 이를 혹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식량주권 확보’를 내세워 생산체계의 현상 유지를 원하는 관행농업·농식품기업들과, 기후위기에 대한 절박한 호소를 바탕으로 CAP의 더 많은 정책을 개정하려는 농생태학파 농민집단 양측의 대립은 날로 격화할 전망이다. Collectif Nourrir는 국가전략계획이 CAP의 목표에 부합하는지 진행 상황을 검토하고, 개선상황에 대해 권고를 표출할 목적으로 설립된 위원회 및 지역위원회에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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