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장 선거에 돈 뿌리고도 ‘무죄’

선거 부정금품 신고한 조합원

투표권·조합원 자격 멀쩡한데

법원이 “조합원 아니다” 판단

금품 뿌린 조합장에 무죄 판결

  • 입력 2023.03.19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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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과거 음주운전이 발각된 연예인이 “술은 먹었지만 (그리고 운전도 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발언을 해 세간의 헛웃음을 유발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법원이 이와 비슷한 논리의 판결을 내려 관계자들을 당혹게 하고 있다. 농협 조합장이 선거 당시 금품을 사용했지만 불법 선거운동은 하지 않았다는 판결이다.

오상진 해남 화산농협 조합장은 지난 2019년 조합장 선거운동 당시 운전 중이던 조합원 이종린씨를 불러세워 현금 30만원의 금품을 제공했다. 돈을 받은 이씨는 곧 선거관리위원회를 찾아가 이를 신고했다. 이씨는 선관위로부터 500만원의 신고포상금을 받았고, 오 조합장은 2021년 9월 1심 판결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당선무효형을 받았다.

문제의 판결은 지난달 초에 나온 이 사건 항소심 판결이다. 오 조합장은 항소심에서 감형이 아니라 무려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공정위 측이 제공한 판결 요지를 살펴보면 금품수수 사실이 부정된 건 아니다. ‘금품을 받은 이씨가 조합원 자격이 없기 때문에’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논리다.

어처구니없게도, 재판부의 주장과 달리 이씨는 버젓한 화산농협 조합원이다. 710평의 땅에 300주의 감나무를 키우며 2014년부터 조합원에 가입해 지금도 그 자격을 유지 중이다. 사건 당시인 2019년 제2회 동시조합장선거는 물론, 2015년 제1회 선거와 올해 제3회 선거까지 모두 투표에 참여했다.

재판부가 이런 이씨의 조합원 자격을 부정하는 이유는, 이씨의 본업이 택배업이고 농업은 수익활동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수익 문제를 떠나 이씨는「농업협동조합법」이 규정하는 조합원 자격(200평 이상의 농지에서 과수를 재배하는 자)을 충족하고 필요 서류를 갖춰 오히려 조합에서 제명하는 게 어려운 존재다.

화산농협에서 지난달 28일자로 발급받은 이종린씨의 조합원증명서. 과거에도, 앞으로도 이씨는 화산농협 조합장 선거의 투표권을 갖는다.
화산농협에서 지난달 28일자로 발급받은 이종린씨의 조합원증명서. 과거에도, 앞으로도 이씨는 화산농협 조합장 선거의 투표권을 갖는다.

지역 농민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최용옥 해남군농민회 화산면지회장은 “농협법에 따라 조합이 승인한 조합원인데, 법원이 이 모든 걸 부정하고 조합원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낸 것”이라며 “법원이 법을 바꾸는 입법기관인가”라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재판부가 촉발한 ‘조합원 자격’ 문제는 이 사건의 본질적 쟁점이 아니다. 금품수수가 이뤄질 당시 이씨가 투표권을 갖고 있었고 오 조합장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 이 사실관계가 부정되지 않는 이상 ‘무죄’ 판결은 대중을 납득시킬 수 없다.

성하목 전 해남군농민회장은 “우리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가 상식조차 외면하며 자본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라며 “무죄 판결도 문제지만, 2019년 선거 때 시작된 재판을 2023년 선거 때까지 질질 끌고 있다. 금품을 쓴 조합장이 4년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이번 선거에 다시 나와 당선까지 됐다”고 씁쓸해했다.

이종린씨는 “지난해 12월에 항소심 재판부가 날 증인으로 부르길래 돈 받은 사실을 재차 확인하려는 줄 알았는데, 내 개인정보를 싹 조사해 공개하며 나를 심문하더라. 담당검사도 공익제보자인 나를 보호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박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며 매우 불쾌해하고 있다.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상고된 상태며, 이씨와 지역 농민들이 탄원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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