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정부가 조장한 쌀값 폭락이 햅쌀 수확기 산지 분위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당장은 농협이 ‘수매가’라는 칼자루를 쥐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데, 고민의 결과에 따라 폭탄이 농민에게 돌아올 우려가 있다.
정부의 수확기 쌀값 대책에도 불구하고 농협은 여전히 비상상황에 처해 있다. 민간RPC보다 양곡사업의 탄력성·자율성이 떨어지는 만큼 폭락 국면에서 큰 피해를 보는 건 필연이다. 지난달 20일 기준 전국 농협의 구곡(2021년산) 보유량은 25만톤. 조금씩 방출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수매량의 절반도 채 소진하지 못한 농협도 있으며 규모에 따라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십억원의 적자결산이 유력한 상태다.
전남지역 조합장 A씨는 “아직도 작년산 벼(40kg)가 10만개 이상 쌓여 있다. 배당은 고사하고 손해가 얼마나 날지 가늠할 수도 없다”라며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미룸으로 인해 농협이 피해를 떠안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더 큰 문제는 신곡 수매다. 경영적 관점으로만 생각하자면 대규모 손해를 입었으니 신곡 수매가를 예년보다 낮춰야 할 상황이지만, 농협의 역할과 정체성을 생각하면 이 또한 못 할 일이다. 인건비·농자재값 등 생산비가 유례없이 폭등한 상황에서 농협의 부담을 줄이고자 수매가를 낮춘다면, 농협의 뿌리인 농민의 삶을 갉아먹는 결과를 낳는다. 가뜩이나 생산자단체들이 ‘전년 이상의 수매가’를 외치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이다.
조합장들 개인의 입장에서 좀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이번 벼 수매는 내년 3월 8일 전국 동시조합장선거를 앞둔 마지막 수매다. 수매가를 낮추거나 수매량을 줄였다간 바로 표심 이탈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농협의 본분, 조합장직 연임이라는 목표와 내년까지 이어질 큰 폭의 적자 사이에서 조합장들은 머리를 싸매고 있다.
전국 쌀값의 척도를 제시하는 건 가장 먼저 수매가를 확정하는 강원 철원과 경기 여주·이천 지역이다. 다행히 철원은 전년과 같은 수준의 수매가를 결정하는 용단을 내려 농민들의 우려를 덜어줬다. 동송농협·철원농협이 지난달 8일 kg당 2,040원을 결정(동송농협 동결, 철원농협 10원 인상)한 뒤 25일 동철원농협도 이 가격을 따른 것이다(동결).
최진열 철원농협 조합장은 “우리 농협이 20억원가량, 규모가 큰 동송농협은 그 이상의 적자가 예상된다. 하지만 수매가를 내린다 해도 지금같은 시장 상황이면 회복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고 농민 피해만 커진다. 모든 생산비가 30%씩이나 오른 만큼, 농협이 최소한의 농가 소득을 지켜주면서 정부에 요구할 걸 요구해야 한다”고 취지를 전했다.
하지만 모든 지역의 분위기가 철원 같진 않다. 당장 철원에서도 김화농협만은 수매가 결정을 미루고 있으며, 선급금 지급 방식이 일반적인 남부지역에선 전년대비 1만원(40kg) 이상 깎인 선급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여주는 지난달 초 통합RPC 운영협의회에서 ‘수매가 동결’을 합의했음에도 조합장들이 여태 최종 결정을 유보하면서 이천과 눈치싸움을 벌이는 낌새다. 이에 여주시농민회가 지난달 29일부터 관내 농협들에 나락을 적재하며 결정을 압박하고 있다.
10월은 본격적으로 전국 농협들이 수매가(선급금) 결정을 시작하는 시기다. 최근의 시원스럽지 못한 분위기를 볼 때 상당수 농협에서 수매가를 낮출 가능성이 엿보이는데, 정부에서 농협으로, 농협에서 농민으로, 점점 약한 쪽으로 부담이 전가된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크다. 정부의 양곡정책 실패가 농협에겐 불편한 가을, 농민에겐 불안한 가을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