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김태형·한우준 기자]
전국 각지 농민들이 정부의 농축산물 시장개방 정책을 비판하고 농업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기 위해 서울역 인근에 모였다. 최근 쌀값이 45년 만의 최대 하락 폭을 기록한 가운데 열린 이날 대회에는 쌀값 폭락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들끓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한국4-H본부,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 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 한국4-H청년농업인연합회, 전국농업경영인조합장협의회, 농협조합장정명회 등 9개 농업 관련 단체들은 29일 오후 서울역 인근에서 ‘농가경영 불안 해소 대책마련 촉구 농민 총궐기 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는 주최 측 추산 농민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사와 풍선날리기 상징의식, 투쟁발언, 연대발언, 정치연설, 현수막 찢기 상징의식, 결의문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이학구 한농연 회장은 대회사에서 “오늘 우리는 그칠 줄 모르고 떨어지는 쌀값 하락세와 나날이 치솟는 농업생산비 보전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모였다”고 밝혔다. 이어 이학구 회장은 “구곡 가격은 신곡 가격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당분간 쌀값 하락세가 계속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실제 5월 기준 무기질비료 가격은 전년 대비 91%, 6월 기준 면세 경유 가격은 전년 대비 103.8% 인상돼 농민들의 부담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농산물 가격 하락과 농업 생산비 증가로 인한 농가경영 불안과 수입에 의존한 물가 정책은 결국 우리 농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원오 전농 의장은 “종자값, 비료값, 영농자재비, 인건비, 기타경비까지 안 오른 물가가 없다”며 “그나마 지방선거가 끝나고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조금씩 도와준다고 하지만, 결국 중앙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농민과 농산물이 물가상승의 주범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물가 잡는다고 농산물 수입만 하고 있다”며 “생산비 폭등과 쌀값 폭락이라는 이중고를 겪는 농민들을 위해 정부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대조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장은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에 감사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할 한가위를 앞두고 우리는 여기에 모였다”며 “우리는 오늘 농가경영 불안해소를 위해 쌀값을 안정시키고 농업생산비 보전대책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농민과 연대하는 농협 조합장들의 목소리도 나왔다. 곽근영 전국농업경영인조합장협의회장은 “지난달 기준 농협이 보유한 쌀 재고는 61만톤으로, 지난해 대비 2배 수준”이라며 “농협 창고의 3분의 1이 구곡으로 채워져 있어 햅쌀 수매에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농협 보유분 격리를 통해 농협 창고 공간 확보 및 손실 보전이 절실하다”며 “쌀 생산량과 시장 상황에 대한 모니터링을 통해 선제적으로 시장격리 조치를 실시하고, 궁극적으로는 초과 물량에 대해 의무적으로 자동 격리해 줄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국영석 농협조합장 정명회장은 “농업 문제는 우리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우리 국민들의 건강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제값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속가능한 농업이 되려면 농가경영 불안 해소를 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진 정치연설에서는 강훈식·서삼석·신정훈·이원택·윤준병·윤재갑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단상에 올라 더 이상 정부 탓을 하지 않고 쌀값 문제 해결과 농가경영안정을 위한 대책 마련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다음달 1일 원내대표 주재하에 쌀값 정상화를 위한 TF를 결성하고 간담회를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대회를 마친 농민들은 ‘농민 생존권 사수’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각 소속 단체 깃발을 든 채 ‘선제적 시장격리 실시하라’, ‘농업 생산비 보전 대책 마련하라’ 등 구호를 외치며 2개 차로를 이용해 대통령실이 있는 삼각지역 인근까지 행진했다.
행렬 속 농민들은 절실한 마음을 드러내는가 하면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농민 허남희씨(강원 양구)는 “농민들은 스스로 국민들의 식량을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농사짓고 있음에도 농정 수준은 20년도 더 전의 수준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이라며 “농민도 국민과 더불어 같이 살 수 있기 위한 정책을 마련해 달라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농민 은명규씨(전북 정읍)는 “이 짓(상경)이라도 해야 분이 좀 풀리지, 계속 속 앓고 있다가 농민들하고 같이 왔다”며 “나락값이 40kg에 지금 4만3,000원, 작년보다 50%나 깎인 값이다. 나 같은 조그마한 농가들은 정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고 분노했다.
삼각지역 인근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학구 한농연 회장은 대통령실 관계자에 농정 건의문을 전달했다. 뒤이어 도착한 일부 농민들은 항의의 의미에서 볏짚에 불을 붙이려다 소화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들의 제지에 막혔다. 이들은 이어 ‘농업말살 윤석열 규탄’이라는 문구가 적힌 모형관을 경찰들 사이로 넘겼다.
대회에 앞서 이날 오후 농민단체들의 연합체인 국민과함께하는농민의길(상임대표 양옥희, 농민의길)도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모두가 식량위기와 식량주권을 떠들어대지만, 정작 그 근간인 농업은 어떻게 유지해야 한단 말이냐”라며 “이대로라면 농민과 농업은 지속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구곡 전량 격리 및 신곡 선제 격리 △밥 한 공기 쌀값 300원 보장 △농업생산비 폭등 대책 마련 △농산물 수입 즉각 중단 등을 요구하며 1톤 트럭에 실린 톤백(벼 담는 포대)을 찢어 볍씨를 길에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