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농민들은 낫으로 나락이 담긴 톤백들을 찢었다. 나락은 톤백에서 국회 정문 앞 도로 아스팔트 위로 폭포수마냥 쏟아져 순식간에 수북이 쌓였다. 농민들은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쌀값을 보장하라”, “식량주권 사수하자”, “양곡관리법 개정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장 하원오, 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장 양옥희), 전국쌀생산자협회(회장 김명기) 등 농민단체들은 지난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과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앞 도로에서 ‘톤백 찢기’ 상징의식을 벌이며 자식과도 같은 쌀을 도로에 쏟아냈다. 45년 만에 쌀값이 가장 큰 폭으로 폭락했음에도, 정부가 쌀값 보장을 위한 근본 대책(쌀 시장격리, 양곡관리법 개정, 쌀 40만8,000톤 수입 중단 등) 마련에 나서지 않는 상황을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국회 정문 앞엔 전농 광주전남연맹(의장 이갑성, 전농 광전연맹) 회원 약 50여명이 모였다. 톤백 찢기 상징의식을 위해 전남·전북에서 각각 5톤짜리 트럭에 6.4톤, 3.2톤씩, 도합 9.6톤의 쌀을 보내왔다. 전남의 쌀 6.4톤이 담긴 톤백이 트럭에 실린 채 국회 앞에 당도하자, 농민들은 톤백 앞에 달려들어 낫으로, 손으로 톤백 마대들을 찢고 잡아당겨 쌀들을 아스팔트 바닥에 한 알갱이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피눈물 나는 농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등포경찰서 측은 농민들이 ‘불법집회’를 연다며 해산하라는 경고만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집회 사회를 보던 김선호 전농 광전연맹 사무처장은 “쌀값을 양곡관리법에 의해 관리해야 하건만 국회도, 정부도 양곡관리법을 지키지 않아 쌀값이 45년 만에 최대치로 폭락했다. 이처럼 정부와 국회가 법을 안 지키는 상황에서 우리 농민에게만 법을 지키라는 거냐. 정부는 이 상황을 계속 방치할 텐가? 농민들은 단결된 힘으로 쌀값을 지키고자 오늘 이 자리에 모였다”고 일갈했다.
이윽고 전북에서 보내온 두 번째 나락 적재 트럭이 도착했다. 농민들은 톤백을 찢고자 트럭으로 접근하려 했으나 경찰들에게 가로막혔다. 이 와중에 김 사무처장은 경찰들을 뚫어내고 톤백에 접근해 커터칼로 구멍을 뚫었다. 톤백에선 나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쌀이 쏟아지던 현장을 둘러싼 경찰들 뒤론 국회 직원들이 흘깃흘깃 쌀들을, 농민들을 보며 지나갔다. 집회에 참가한 한 농민은 “저기 들어가는 사람들은 국회 앞에서 점심식사하며 쌀밥 먹고 다시 국회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쌀값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인가”라며 국회 관계자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쌀값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이날 국회 앞 투쟁 및 서울역 앞 전국 농민대회 결합을 위해 새벽길을 나선 장흥군 농민 이영록 씨는 “시장격리 조치 등의 합당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남지역 대부분의 농협들이 (판로 확보의 어려움 및 쌀의 장기 저장에 따른) 적자문제가 심각하다. 장흥 관산농협의 경우도 약 16억원의 적자를 기록 중인데, 전남 타 지역 농협 중엔 80억~90억원까지 적자를 기록한 곳들도 있다”며 “현재 2개월치(약 35만톤) 수준인 비상상황 대비용 쌀 비축량을 6개월치인 180만톤으로 늘리는 등의 조치를 시급히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흥군 관산읍의 한 농민은 “지난해 한 포대당 1만원이었던 비료값이 3만원으로, 1인당 하루 8만원이던 인건비도 16만원으로 오르는 등 모든 비용이 다 올랐는데 오직 쌀값만 떨어지고 있다. 농민들은 뭘 먹고 살라는 것인가”라며 “이런 상황에서 신곡이 시장에 풀리면 쌀값은 더더욱 폭락할 것이다.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