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아

  • 입력 2021.11.01 00:00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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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호 기자
한승호 기자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30년 넘게 배추농사를 지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여.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망가졌어.” 밭 두둑을 뒤덮고 있던 검은 비닐을 걷어내기 위해 들추자 힘없이 박혀 있던 배추들이 먼지와 함께 굴러떨어졌다. 노랗게 짓무르거나 썩어버린 배추가 태반이었고 속이 제대로 차지 않아 쌈배추로도 사용 불가했다.

순식간에 찾아온 병해에 가을배추 3,000평 농사가 그렇게 망가졌다. 상인과 합의했던 포전거래(밭떼기)는 파기됐다. 썩어버린 배추를 그냥 두자니 집 앞에 펼쳐진 을씨년스런 풍경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비용 부담에 인력을 들일 수도 없어 올해 78세와 76세, 노부부는 둘이서 사흘째 밭 정리에 나선 참이라고 했다.

전국에 서리가 내리는 등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농가들의 가을나기가 어수선하다. 이상기후로 인한 농작물 재해가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가을에 내린 잦은 비가 그 피해를 더 키웠다.

전북 부안과 충북 제천 등지에선 추수를 앞두고 벼 이삭이 하얗게 말라버렸다. 청주와 괴산에선 배추가 물러지는 병이 왔고 안성에선 우박과 강풍으로 과수 및 밭작물 피해가 잇따랐다. 강원도 횡성에선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 수확을 앞둔 양상추가 얼어붙었다.

유례없는 농작물 재해에 추수의 계절을 지나는 농민들의 속앓이는 여전한데 이를 지원하기 위한 정부 대책은 감감무소식이다. 농작물 재해보험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민간보험에 가까워 피해를 입증하고 보상받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정작 재해를 입은 농민들이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일상화된 기후위기 속에서 상시적인 자연재해, 재난에 노출된 농민들은 언제나 ‘을’이다. 속수무책 당할지라도 그 모든 부담을 오롯이 떠안아야 한다. 지난해 8월 섬진강 수해로 삶터, 일터를 모두 잃은 전남 구례 주민들은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배상을 못 받은 채 살아가고 있다.

‘갑’인 이들은 여전히 ‘나몰라라’로 일관하고 있다. 진정 세상이 ‘개벽’해야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역전될 것인가. 힘없이 나자빠지는 배추와 이를 정리해보겠다고 애쓰는 70대 농부를 마주하고 있자니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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