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업체가 손 떼는 국산우유 가공, 낙농가가 나선다

[기획] 축산농가, FTA 미로를 건너다 ④

  • 입력 2021.10.17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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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낙농은 다른 축종에 비해 FTA로 인한 농가의 직접적 타격이 크지 않은 편이다. 국산-수입 시장이 백색시유와 유제품으로 구분돼 있고 쿼터제와 원유가격연동제로 수급·가격관리도 양호하게 이뤄져왔다. 하지만 낙농강국들과의 FTA가 속속 체결되면서 유제품 수입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한 건 사실이며, 국내 유업체들은 경쟁력 제고를 위해 국내생산 유제품의 원료를 값싼 수입분유에 의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낙농가들은 유업체의 감산 및 관리 압박, 원유가격 인하 압박 등 간접적 피해를 겪어야 하는 처지다.

시유 소비 감소와 유제품 소비 증가. 수입에 속수무책인 유제품 시장을 감안할 때 이대로라면 낙농가의 앞날은 뻔하다. 국산우유를 원료로 한 유제품 생산을 절실히 고민해야 할 때며, 이런 고민은 기성 유업체들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 낙농가에서 접할 수 있다. 이번 기획에선 직접 생산한 우유로 소소하나마 독자적인 유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낙농가를 통해 우리 낙농업의 미래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최철 애심목장 대표가 직접 만든 숙성치즈(고다치즈) 덩어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축산과학원 및 동료 낙농가들과 공부하고 연구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최철 애심목장 대표가 직접 만든 숙성치즈(고다치즈) 덩어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축산과학원 및 동료 낙농가들과 공부하고 연구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낙농업은 생산·가공·서비스를 융합한 6차산업의 접근성이 매우 용이한 품목이다. 생산하는 과정이나 모습이 재미있고 생산물은 여러 방법으로 가공이 가능하다. 생산과 가공 과정, 그리고 가공품을 이용한 요리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이 체험할 수 있는 요소가 다양하다. 전국 체험목장의 대다수를 낙농가가 점유하고 있는 이유다.

경기 연천의 ‘애심목장’ 역시 낙농 체험목장이다. 30마리 사육에 하루 1톤 납유. 특별할 것 없는 규모지만 파랗게 깔린 잔디밭과 정겨운 젖소 조형물들, 작은 집에서 뛰어나와 사람을 반기는 송아지 등 농장 풍경은 일반적인 축사와 사뭇 다르다.
 

인기척을 듣고 보금자리에서 뛰어나온 송아지에게 젖 대신 손가락을 물려주고 있는 최철 대표. 체험학습을 위해 잔디밭에 별도의 송아지 집을 마련해 뒀다.
인기척을 듣고 보금자리에서 뛰어나온 송아지에게 젖 대신 손가락을 물려주고 있는 최철 대표. 체험학습을 위해 잔디밭에 별도의 송아지 집을 마련해 뒀다.

낙농가 소득의 새로운 한 축, 체험학습

최철 대표가 부모님의 뒤를 이어 애심목장을 관리하기 시작한 건 1994년. 처음엔 여느 농장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농장이었지만, 2006년 농축산분야 젊은 CEO를 육성하기 위한 경기도의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6차산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전까진 정책교육이라 하면 호텔 같은 데서 ‘럭셔리’하게 형식적으로 하는 게 많았는데 막상 가보니 교육 내용이 재미있고 유용한 현장학습도 많더라구요. 늘 농업에 문제의식만 품고 있다가 ‘이런 패러다임도 있구나’ 싶었죠. 그때 교육을 받으면서 체험학습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어요.”

천생 농민이 6차산업에 뛰어드는 데는 정책지원이 큰 힘이 됐다. 2007년 농촌진흥청 사업으로 체험학습을 시작했고, 2009년 경기도 밀크스쿨 사업에 참여한 뒤 목장에 체험장, 유가공장 등 시설을 갖춘 번듯한 체험목장을 꾸리게 됐다.

애심목장에 체험을 오면 목장 소개, 경축순환농업, 공룡알(곤포 사일리지) 작업과정 등을 소개하는 영상을 관람한다. 이후 목장으로 이동해 송아지 관찰·먹이주기를 하고, 우사에서 소의 일생, 먹고 싸는 양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마지막엔 아이스크림·치즈·피자 등을 만드는 가공·요리체험으로 이어진다.

납유와 체험의 수익 비중은 3대1 정도다. 납유만 하는 농가에 비해 일찍이 ‘숨통’ 하나를 더 틔워둔 것이며 그 자체가 농장을 운영하는 또 다른 활력이 된다. 다만, 코로나19 탓에 체험학습 유치가 원활치 않은 것이 최근의 고민거리다.
 

코로나19 이전 애심농장 체험학습에 참가한 어린이들. 체험학습은 이달 말께부터 재개할 예정이다. 애심목장 제공
코로나19 이전 애심농장 체험학습에 참가한 어린이들. 체험학습은 이달 말께부터 재개할 예정이다. 애심목장 제공

수입 치즈·분유에 맞설 ‘안전한’ 유제품을 만들다

체험만큼은 아니지만 애심목장의 또 다른 수익원이 바로 유제품이다. 대학에서 낙농을 전공한 탓에 전부터 치즈에 대한 관심이 있었거니와, 체험목장을 준비하면서 좀더 자세히 배울 필요를 느꼈다.

서울우유(협동조합)가 활약하는 중부지역과 달리 영호남지역 낙농가들은 쿼터 초과생산량 처리가 남다른 골칫거리였고, 때문에 목장 유가공에 대한 교육과 기술이 한 발 앞서 발달해 있었다. 최 대표는 국립축산과학원을 들락거리며 이들 선진 유가공 목장들과 연을 맺었다. ‘한국목장형유가공연구회’라는 이 조직에서 지금은 회장을 맡고 있을 만큼 비중이 크다.

애심목장의 유제품은 요거트와 스트링치즈·구워먹는치즈·숙성치즈로, 연매출은 4,000만원 정도다. 제품의 종류나 판매실적이 엄청난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숙성치즈를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노력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애심목장에서 생산하는 유제품들. 요거트와 3종의 치즈가 상시 판매되고 있다.
애심목장에서 생산하는 유제품들. 요거트와 3종의 치즈가 상시 판매되고 있다.

수입 제품과 비교할 때 가격경쟁력이 우위일 리 없고 풍미가 더 우수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목장에서 생산하는 국산 유제품은 신선도, 먹거리안전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중에 여러 개씩 묶어 파는 요거트를 먹어보면 맛이 밍밍하거든요. 원유가 아닌 수입분유를 원료로 사용해서 우유의 풍미가 확 떨어지는 거에요. 스트링치즈 또한 개별포장해서 그렇게 오래 유통할 수 있다는 건 보존제가 포함 안될 수 없는 거죠. 목장 유제품은 단일 목장에서 관리된, 당일 짜낸 신선한 원유로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청결 유지가 중요한 체험목장인 데다 직접 만드는 유제품의 원료가 되는 만큼 소와 우사 관리에 드는 공도 각별할 수밖에 없다. 애심목장은 서울우유 납유농가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원유만 모은 ‘나100%’ 제품의 납유농가임은 물론, 최근 ml당 체세포수 5만~9만개(1등급: 20만개 미만), 세균수 3,000~5,000개(1A등급: 3만개 미만)라는 괄목할 성적을 내고 있다.
 

애심목장 우사의 젖소들.
애심목장 우사의 젖소들.

FTA 시대 낙농업의 활로, ‘목장형 유가공’

FTA 시장개방의 대홍수, 농업이나 축산업 모두 사양산업이라고 하지만 애심목장은 6차산업을 통해 비전을 만들어가고 있다. 집유만 하던 시절엔 목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들이 농고-농대를 졸업하고 20대 초반부터 목장일을 함께하면서 이제는 3대가 이어가는 목장이 됐다. 체험학습에 코로나19라는 변수가 등장하자, 내년부턴 치즈카페나 아이스크림 전문점 같은 지역 명소를 만들어보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그리고 있다.

전국엔 수많은 낙농 체험목장이 있고, 애심목장처럼 유제품을 상품화해 판매하는 목장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비록 소비기반이 아직 탄탄하지 못한 탓에 대중적 선호도가 높은 몇몇 종류로 생산품이 국한돼 있지만, 목장마다 소에게 먹이는 먹이와 물, 주변 환경에 따라 맛과 특성이 다르다는, 조금 다른 관점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시유시장이 축소하고 유제품시장이 성장하는 건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특히 치즈의 경우 원유의 양을 10분의1로 압축하는 원유의 대량소비처이기도 하다. 국내 유가공업체들의 수입원료 사용이 계속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목장형 유가공이 반드시 활성화돼야만 우리 낙농업이 FTA의 파고를 견뎌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차분한 어조인 최 대표의 말에도 강한 의지와 책임감이 깃들어 있다.

“소규모 목장 유가공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소비자에게 분명 차별성이 있거든요. 아무리 수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 해도 국내산 유제품의 고유한 자기영역은 있어요. 여태껏 백색유 시장에 집중했던 걸 유제품시장으로 넘어와야 해요. 무엇보다, 우리 먹거리를 국내에서 공급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 이 기사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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