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 그리고 농성

  • 입력 2021.09.05 18:00
  • 기자명 한승호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한승호 기자
한승호 기자

이발기에 백발의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잘려 나갔다.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이 서로 엉킨 채 나뒹굴었다. 삭발하는 내내 어떤 이는 눈을 질끈 감았고 어떤 이는 서러운 듯 눈물을 흘렸다. 삭발이 끝나고 어색해진 짧은 머리에 ‘단결 투쟁’이 적힌 붉은띠를 둘러맸다.

8월의 마지막 주, 충남 예산과 전남 화순에서 차례로 농민들과 농촌 주민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주장하는 내용엔 차이가 있었지만 그 기저에 깔린 배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농지 짓밟는 산업단지 확대에 반대한다!’ 예산 고덕면 상몽리 주민들은 기존 산단에 추가로 산단을 조성하려는 군 계획에 반발해 삭발 후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산단 추가조성은 기존 산단과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농지 파괴와 주민들의 일방적 희생만 강요할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단식농성을 시작한 한 농민은 “다음에 만나게 될 장소는 병원이 될 것”이라는 말로 결의를 드러내 주위를 숙연케 했다.

‘(신재생)에너지는 정부가 책임져라!’ 화순 동복면 주민들은 주민 동의 없이 진행되는 풍력발전시설 저지를 위해 삭발에 나섰다. 군의회가 풍력발전시설 설치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이격거리를 대폭 완화하는 조례를 일방적으로 개정하자 주민들은 이격거리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주민 발의 조례 개정안을 군에 제출한 뒤 수개월에 걸쳐 처리를 독려한 바 있다. 그러나 군의회가 조례안 처리에 미온적으로 나서자 ‘머리 위에 풍력발전기를 두고 살 순 없다’는 주민들의 분노가 결국 천막농성까지 이어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두 사례는 전혀 특이하지 않다. 산업단지든, 풍력·태양광시설이든 개발광풍에 내몰려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든 농촌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다. 농민들이, 주민들이 머리를 깎고 곡기를 끊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지언정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저항한다.

그래서 묻는다. 관에서 힘으로 찍어누르면 그 어떤 일이라도 가능한 곳이 농촌인가. 주민간 갈등이 있건 말건 보상금 앞세워 흔들면 그만인 곳이 농촌인가. 정치 또는 사업한다는 이들이 농촌을 바라보는 철학이란 게, 이렇게 천박하고 저열한 곳이 이 나라인가.

키워드
#기자수첩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