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겨와 쌀겨, ‘폐기물’ 아닌 ‘자원’이다

  • 입력 2021.08.27 16:5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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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남부지역 유정란 생산농가 A씨 축사 바닥엔 왕겨와 부엽토를 섞은 깔개가 깔려있다. 닭똥은 이 깔개에서 자연발효된다. 또한 닭들은 깔개 위에서 모래목욕을 해 벌레와 기생충을 떨쳐낸다.
남부지역 유정란 생산농가 A씨 축사 바닥엔 왕겨와 부엽토를 섞은 깔개가 깔려있다. 닭똥은 이 깔개에서 자연발효된다. 또한 닭들은 깔개 위에서 모래목욕을 해 벌레와 기생충을 떨쳐낸다.

남부지방의 유정란 생산농민 C씨. 그는 20년간 동물복지형 양계로 생산한 유정란을 직거래로 공급해 왔다.

C씨는 동물복지 축산을 20년간 영위할 수 있던 원동력 중 하나로 ‘왕겨’를 꼽았다. 왕겨는 쌀 가공과정에서 벗겨진 겉껍질이다. 미곡종합처리장(RPC)엔 왕겨, 그리고 벼에서 왕겨를 뽑아낸 뒤 현미를 백미로 가공하면서 분리되는 ‘쌀겨’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C씨는 인근 RPC에서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왕겨를 마대자루 약 30개에 담은 뒤 트럭에 싣고 온다. 닭들이 사는 축사에 깔기 위해서다.

산란계 농가 입장에서 왕겨는 특히 깔개 재료로 중요하다. C씨는 “왕겨와 부엽토를 섞어 만든 깔개 위에 닭이 똥을 싸면, 왕겨와 부엽토에 남아 있는 미생물이 똥의 자연 발효를 돕는다. 발효가 잘되니 자연히 축사에 똥도 잘 안 쌓이고 냄새도 경감된다”며 “돼지·소 축사에서도 왕겨를 많이 활용한다”고 밝혔다.

또한 왕겨를 깐 바닥은 닭의 생활환경도 윤택하게 만든다. C씨는 “닭들은 왕겨와 부엽토를 섞어 만든 깔개 위에서 모래목욕을 하며 몸에 붙어있던 기생충과 벌레들을 떼어낸다. 따라서 살충제가 필요없다”고 언급했다. 공장식 축산 환경에선 닭에게 살충제를 뿌려야 벌레와 기생충을 제거할 수 있는데, 왕겨가 깔린 동물복지형 농장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왕겨와 부엽토, 닭똥을 섞어 만든 퇴비는 주변 유기농가에서도 많이 가져간다는 게 C씨의 설명이다. 특히 벼농가와 김장배추·무·감자농가에서 많이 가져간다. 왕겨부터가 벼농사 과정의 부산물로 나온 것인데, 돌고 돌아 다시 벼농사 과정에 투입되는 셈이다. 왕겨는 자원순환 농사에 매우 중요한 물질이라는 게 C씨의 입장이다.

RPC에서 배출되는 또다른 물질인 쌀겨도 자원순환 농법에서 많이 활용된다. 고(故) 강대인 정농회 전 회장은 저서 <강대인의 유기농 벼농사>에서 쌀겨 활용 벼농사의 효과로 △미생물의 영양분 섭취에 따른 벼의 영양분 증가 △질소질 이삭거름 대비 수확량 증가 △보온효과 등을 들었다. 한편 일본 농민들의 경우, 벼 재배 과정에서 쌀겨를 활용한 제초 방안에 대해 장기간 연구한 바 있다.

그러나 현행「폐기물관리법」상 쌀겨와 왕겨는 폐기물로 분류돼 있다. 법적으로 1일 평균 300kg 이상의 폐기물을 배출하는 사업장의 배출물질은 ‘사업장 폐기물’로 구분된다. 사업장 폐기물은 배출자와 운반자, 처리자가 모두 허가를 받고 환경부의 폐기물 적법처리시스템인 ‘올바로’를 통해 처리하게끔 돼 있다. 이에 따라 RPC에서 배출되는 쌀겨·왕겨도 사업장 폐기물로 분류돼 온 것이다.

현장 농민들이 쌀겨와 왕겨를 RPC에서 받아 활용해 온 지 오래된 상황에서, 정작 법적으로 쌀겨와 왕겨가 ‘폐기물’로 규정돼 있다 보니 혼선이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전북 고창부안축협은 폐기물 수집·운반 관련 허가를 받지 않은 채 RPC에서 왕겨·쌀겨를 배출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고발당했다. 현행 폐기물관리법은 왕겨·쌀겨를 ‘무단취급’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왕겨와 쌀겨를 농사 과정에 활용해 왔던 농민들, 그리고 RPC 관계자들은 해당 물질을 폐기물 처리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모 지자체 RPC 관계자는 “현장 농가들의 쌀겨·왕겨에 대한 수요는 상당하다. 특히 축산농가들 입장에선 퇴비 부숙, 깔개 활용 등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쌀겨·왕겨 공급업체들도 종종 RPC를 오가며 쌀겨·왕겨를 가져가 농민들에게 공급한다”며 “이러한 ‘수요’가 없을 시 RPC에서 막대한 양의 쌀겨·왕겨를 다 저장하기 힘들다. 쌀겨·왕겨에 대한 과도한 규제는 완화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 일부 국회의원들도 쌀겨·왕겨에 대한 법적인 ‘관점 전환’을 요구 중이다. 이원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지난 6월 17일「자원순환기본법」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자원순환기본법 상에선 ‘순환자원 인정 시 인정신청 절차 등의 일부를 생략할 수 있는 물질’을 규정한다. 이 물질 목록에 쌀겨·왕겨를 추가해 순환자원으로 인정받도록 하고, 쌀겨·왕겨 활용 농가들의 부담을 경감시키자는 게 이 의원의 입장이다.

한편 임이자 국민의힘 국회의원, 서삼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폐기물관리법 일부개정안을 각각 지난 6월 18일, 6월 21일 대표발의했다. 공통적으로 쌀겨와 왕겨가 자원으로 활용되는 한 폐기물 분류대상에서 제외하자는 내용이다.

임 의원은 “곡류 등의 도정과정에 생기는 왕겨·쌀겨 등 농업부산물은 환경오염 가능성이 현저히 낮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폐기물과 동일하게 300kg 이상 배출 시 사업장 폐기물로 간주돼 과도한 규제를 적용받는다”며 “왕겨·쌀겨 등을「사료관리법」에 따른 사료,「비료관리법」에 따른 비료로 재활용할 시 현행법령에 따른 폐기물에서 제외토록 해 농가 부담을 낮추고, 자원 재활용을 더욱 활성화하고자 한다”고 법안 발의 취지를 밝혔다.

이와 관련해, 환경부 측 관계자는 “그동안 쌀겨·왕겨를 폐기물 취급해 온 것에 대한 민원이 많았다”며 “현재 환경부에서도 쌀겨·왕겨의 폐기물 지정 대상 제외 건에 대해 심도깊게 논의·검토하고 있다. 조만간 관련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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