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쌀이 이북에 닿을 때까지

  • 입력 2021.06.02 08:58
  • 수정 2021.06.06 18:49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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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통일쌀 경작지를 알리는 팻말 너머로 모를 심는 이앙기가 보입니다. 이날 총 한 필지, 1,200평의 논에 모를 심었습니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31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 위치한 예산군농민회 통일쌀 경작지에서 농민들이 이앙기로 모를 심고 있습니다. 이날 총 한 필지, 1,200평의 논에 모를 심었습니다. 한승호 기자

바쁜 생활 속에 종종 잊게 되곤 합니다만, 우리는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로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오래됐고, 몇몇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도 남북관계에 별다른 진척이 없다보니 이제 많은 이들이 지친 것도 같습니다. 

이제는 ‘통일’을 실현가능성 없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치부하는 분위기조차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만연해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선 하나 된 우리나라를 만나기 위한 실천을 포기하지 않고 매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단철폐 또한 우리 농업을 살리는 하나의 길임을 믿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매년 북으로 보낼 쌀을 따로 생산하고 있는 농민들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예산군농민회 통일쌀 경작지에서 한 농민이 무논에 담겨 있던 모판을 논둑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
예산군농민회 통일쌀 경작지에서 한 농민이 무논에 담겨 있던 모판을 논둑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31일 예산군농민회 통일쌀모내기 행사가 열린 가운데 농민들이 통일쌀 경작지 앞에서 모내기를 알리는 행사를 갖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br>
지난달 31일 예산군농민회 통일쌀모내기 행사가 열린 가운데 농민들이 통일쌀 경작지 앞에서 모내기를 알리는 행사를 갖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의 한 들녘, 모를 품은 논들 사이에 유일하게 비어있는 논 한 필지가 눈에 띕니다. 예산군농민회가 오로지 ‘통일쌀’ 생산을 하기 위해 마련한 1,200평 규모 경작지로, 여기선 지난 2008년 이후 벌써 10년 넘게 오로지 통일을 위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예산군뿐만 아니라 농민회가 있는 지역이면 어디든, 이 무렵이 되면 날을 잡아 특별한 모내기를 하곤 하는데요. 올해 예산군에선 스무 명 정도가 이곳에 쌀을 심기 위해 모였습니다. 

통일쌀 모내기를 참여형 행사로 치러내는 경우, ‘손모내기’를 하면서 참가자 간의 우애를 다지고 농업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으로 구성하기도 합니다. 농촌 방문이 잦다한들 논을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니 혹시나 싶어 일할 준비까지 마치고 왔는데, 애석하게도 올해 예산 통일쌀 모내기는 이앙기로 진행한다고 합니다.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떡과 막걸리를 나누는 간소한 기념식이 끝나자, 한반도기를 매단 이앙기가 논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합니다.

예산군농민회 한 회원이 이앙기에 한반도기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

“아니, 요즘 못줄 구하기가 어렵더라고.” 

이앙기는 반듯하게 한번에 6개, 8개씩 모를 심지만, 인력으로 심을 때는 못줄이 필요합니다. 논 양측에서 한 사람씩 줄을 잡고 팽팽하게 당기면 그 선을 따라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허리를 굽히며 모를 심고, 한 줄이 채워지면 못줄을 이동한 뒤 또 심고… 그런 식이지요. 조광남 예산군농민회장님은 바로 그 못줄을 못 구했다는 농담으로 재치 있게 넘어가셨습니다만, 실제로는 이제 그중노동을 감당할 만한 젊은이가 없어서라는 슬픈 내용의 귀뜸을 누군가에게 듣습니다. 그 말대로 오늘 모인 인원 가운데 몇몇은, 통일을 바라며 하염없이 지나간 세월 속에 이제 모판조차 들어올리기 힘든 백발의 은퇴 농민이 됐습니다. 

농업 기계화의 시대에 겨우 한 필지의 모내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라, 8조 이앙기가 너댓 번 왕복하니 통일쌀 경작지는 금새 주변의 논들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이앙기의 바퀴가 접근하지 못하는 논의 가장자리나 귀퉁이에 몇몇 농민이 장화를 신고 뛰어들어 손으로 심어주니, 통일쌀 심기는 그렇게 반나절 만에 끝이 납니다.

모를 심던 이앙기가 논둑에 다다르자 예산군농민회 회원들이 줄지어 모판을 이앙기에 싣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
모를 심던 이앙기가 논둑에 다다르자 예산군농민회 회원들이 줄지어 모판을 이앙기에 싣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

전국에서 통일쌀을 심는 농민들은 매년 여기서 추수한 쌀을 북으로 보내는 걸 목표로 하지만, 지난 2007년 이후 사실상 국가 차원의 대북지원조차 끊긴 상황에서 민간의 쌀이 북으로 향하는 건 더더욱 바랄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수확한 쌀은 기금으로 바꿔 통일을 준비하는 다양한 사업에 쓰이고 있죠. 지난 2019년 미래의 통일농사를 준비한다며 마련한, 40대나 되는 ‘통일트랙터’에도 이 쌀을 심고 수확했던 노고가 적잖게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 위풍당당했던 트랙터 행렬 역시 대북제재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판문점 근처 어딘가에서 발이 묶인 채 잠들어있으니, 농민들의 노력은 처절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그 애타는 마음에 꽤나 위로가 될 경사가 생겼습니다. 이북과의 접경지가 많은 경기도에서는 오래 전 ‘평화부지사’직을 두고 남북교류와 통일 준비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요, 올해 전격적으로 농민들과 함께 연천군 군남댐 인근 저수지역에 ‘남북농민공동경작지’를 조성하고 국가 공인의 통일농사를 시작키로 했습니다. 규모에서야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일종의 농업판 ‘개성공단’의 준비단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이앙기에 매단 한반도기가 눈에 띕니다. 이날 총 한 필지, 1,200평 논에 모를 심었습니다. 한승호 기자
이앙기에 매단 한반도기가 눈에 띕니다. 한승호 기자

북측과 가까운 곳에 농경지를 마련해 평화기류 조성에 이바지하고, 최종적으로는 남북 농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며 농업교류의 물꼬를 트자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농업계에 왕왕 있어왔습니다. 농사는 결국 농민들이 짓는 것이니, 만약 오늘 만난 농민들과 같이 그간 꾸준한 실천으로 뜻을 지켜온 이들이 없었다면 이런 시도조차 할 수 없었겠지요. 기나긴 예고편 끝에, 드디어 오는 6월 11일 그곳에선 전국의 통일농사꾼들이 한데 모여 본격적인 통일농사를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앙기가 지나간 자리에 뜬모가 발생하자 한 농민이 모를 다시 심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
이앙기가 지나간 자리에 뜬모가 발생하자 한 농민이 모를 다시 심고 있습니다.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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