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 뒤면 국산콩 사라진다 … 한-미 FTA 독소조항 심각

무관세 TRQ 무기한 증량 … 명백한 ‘굴욕 협상’
콩·감자·오렌지·꿀·분유 해당, 자급기반 잠식 중
2068년, 미국산 무관세 콩이 국산 완전대체 가능

  • 입력 2021.01.31 21:3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무관세 TRQ를 영구히 증량키로 한 한-미 FTA의 독소조항이 국산 콩 농가의 입지를 흔들고 있다. 합리적 내용으로의 협상 수정이 시급하다. 지난해 10월 전북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의 논두렁에서 한 여성농민이 바람에 콩깍지를 날려보내고 있다. 한승호 기자
무관세 TRQ를 영구히 증량키로 한 한-미 FTA의 독소조항이 국산 콩 농가의 입지를 흔들고 있다. 합리적 내용으로의 협상 수정이 시급하다. 지난해 10월 전북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의 논두렁에서 한 여성농민이 바람에 콩깍지를 날려보내고 있다. 한승호 기자

한-미 FTA 협정문에 심각한 독소조항이 있어 대책이 요구된다. 당초 정부가 관세를 유지했다고 홍보한 농산물 품목 가운데 장기적으로 보면 관세철폐와 다름없는 처지에 놓인 품목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품목은 콩·감자·오렌지·꿀·분유(연유) 등 5개다. 정부는 이들 품목의 국내 생산기반을 지키기 위해 일부 무관세 TRQ(쿼터)를 부여하는 조건으로 미국 측의 관세철폐 요구를 무마했다.

눈여겨봐야 할 건 이 TRQ다. 매년 TRQ 물량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야 극히 일반적인 일이지만, 이 5개 품목은 늘려가는 방식이 매우 이례적이다. 발효 첫 해(2012년)부터 5년차(2016년)까지는 정량 합의한 만큼만 TRQ 물량을 늘리되, 6년차(2017년)부터는 매년 3%씩 ‘복리’로 ‘무기한’ 증량하는 것이다. 즉, ‘예외적’으로 관세를 면제해준 TRQ가 한도 끝도 없이 계속 늘어나 결국엔 관세철폐의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콩을 예로 들어보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조항인지 실감이 난다. 한-미 FTA 콩 TRQ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1만톤, 2만톤, 2만5,000톤, 2만5,750톤, 2만6,523톤으로 사전에 합의한 중량대로 이행됐고 2017년부터는 매년 복리로 3%씩 증량, 현재 3만747톤을 이행 중이다.

언뜻 보기엔 증량이 더딘 것 같지만 ‘복리’의 특성상 어느 시점부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돼 있다. 불과 47년 뒤인 2068년이 되면 한-미 FTA 콩 TRQ는 현재 3만747톤에서 2020년 기준 국산콩 전체 생산량(9만여톤)만큼 더 늘어난다. 미국산 무관세 콩의 가격은 국산콩 가격의 6분의 1 미만. 미국산 콩이 덩치를 불리는 만큼 국산콩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대로라면 바로 다음 세대에 태어날 국민들부터 국산콩을 먹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아직 자급률이 탄탄한 감자라고 해서 무사할 순 없다. 콩보단 상황이 낫지만, 현재 3,000여톤의 미국산 무관세 TRQ가 2053년부턴 1만톤대로 올라서고 2190년 무렵부터 국산 감자 6만톤을 완전 대체한다.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다른 경로의 수입 증가나 우리나라의 WTO 개도국 지위 상실(개도국 지위를 상실하면 WTO TRQ에 대해서도 전량 이행의무가 부과된다) 등 국산 소멸을 앞당길 변수는 얼마든지 있다. 더욱이 소멸 시점보다도 그 사이 꾸준히 자급기반이 무너져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국산-수입 소비시장이 다소 분리돼 있는 오렌지·꿀·분유의 경우 콩·감자처럼 뚜렷한 시한부 운명은 아니다. 하지만 수입오렌지는 국산감귤 및 과일시장 전체를 흔들고 있고, 가격이 비싼 수입꿀은 쇠고기시장(고품질 한우-저렴한 수입육)과 반대되는 양상으로 국산꿀을 잠식하고 있다. 수입분유는 가뜩이나 포화시장인 낙농업계의 고질적인 골칫거리다. 대책 없는 TRQ 무기한 증량은 국내 농축산업의 설 자리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요인이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독소조항은 수많은 FTA 중 유독 한-미 FTA에만 존재하는 조항이다. 협상 당시 미국 정부의 고압적 태도와 우리 정부의 무력한 모습이 그려진다. 김기환 농식품부 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과장은 “당시 미국 측에서 전 품목에 대해 관세철폐 요구가 있었고 중요 품목에 관세를 유지하는 게 큰 목표였을 것이다. 결국 TRQ를 내주면서 관세를 지킨 건데, 이것이 패착인가에 대해선 시각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의 의무수입 물량이 국내 총 수요량을 넘어 계속 증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가능하다. 콩은 2104년부터, 감자는 2201년부터 일어날 일이며 오렌지·꿀·분유는 오히려 그 시점이 더 가까울 수 있다. 김 과장은 이에 대해 “상식적으로 봐도 시장상황에 따라 수요가 없는 물량까지 반드시 수입해야 할 리는 없다. 우리 측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한다면 상대국에서도 받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답했다.

문제는 당장의 협상 수정이다. 무관세 TRQ를 무제한으로 늘려가는 독소조항이 사라지지 않는 한, 국내에서 어떤 대책을 내놓은들 해당 품목은 백약이 무효하다. 이 독소조항을 방기하는 것은 관세철폐를 수용한 것과 똑같이 해당 품목의 자급기반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미 FTA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송기호 변호사는 “관세 자체가 지켜야 할 목적은 아니지 않나. 특히 콩 같은 작목은 자립적 산업기반이 정말 중요한 작목인데 관세를 지킨다고 하면서 정작 산업기반을 포기해버린, 명백히 잘못한 협상이다. 반드시 재협상을 해야만 할 부분이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를 요구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