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 아닌 ‘농업법인’이 무너뜨린 농지법

  • 입력 2020.11.29 18:00
  • 수정 2020.11.29 20:05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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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농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황량하게 방치된 농지(왼쪽)와 잘 경작된 밭이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지난 25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들녘에서 적채(붉은양배추)를 수확하던 한 농민은 방치된 농지를 가리키며 “최소 5년 동안 경작된 적이 없었다. 지금은 주인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해당 농지는 한 농업법인이 농지 투기를 위해 구입한 정황이 확인된 곳이다.한승호 기자
농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황량하게 방치된 농지(왼쪽)와 잘 경작된 밭이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지난 24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들녘에서 적채(붉은양배추)를 수확하던 한 농민은 방치된 농지를 가리키며 “최소 5년 동안 경작된 적이 없었다. 지금은 주인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해당 농지는 한 농업법인이 농지 투기를 위해 구입한 정황이 확인된 곳이다. 한승호 기자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은 부동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떤다. 2010년을 전후해 각종 개발이 줄줄이 이어지며 투자 광풍이 멈추질 않아 농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2017년에는 표준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땅값 상승률이 18.66%를 기록했는데 2위 부산과의 격차가 무려 두 배에 가까운 비정상적인 수치였다. 2018년에도 17.5%를 기록했다.

이제 제주농민들이 자가 경작지를 늘려 소득 향상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돼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임차료도 따라 올라, 밭을 기준으로 2016년 1,000원 미만이던 평당 임대료는 이제 1,500원, 2,000원을 호가하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투기세력들이 농지 취득을 위해 농업법인 제도까지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업회사법인, 영농조합법인 등의 농업법인은 농업인 지위가 인정돼 농민과 똑같은 입장에서 농지취득자격증명을 갖출 수 있다. 그런데 농업법인 설립의 기준 요건이 너무 허술해 영농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도 법인을 유지한 사례조차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올해 초 제주에선 지난 2016년 설립 이래 농산물 판매실적은 전혀 없지만 부동산 거래 수는 46회에 달했던 농업법인 관계자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과수원을 매입한 뒤 필지를 12개로 나눠 1년 사이 되팔아 이득을 챙겼다가 징역형을 받은 농업법인 대표도 있었다. 투기 세력에겐 농업법인 제도가 농지 접근을 위한 지름길로 보인 셈이다.

제주도는 지난 2015년 농지기능 강화 방침 이후 실경작이 이뤄지지 않는 농지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고, 판매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위장 농업법인이나 기획부동산 업체가 자행하는 일명 ‘농지 쪼개기’도 적극 단속했지만 농지를 이용한 투기성 매매는 전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제주경찰이 3개월 기획수사 끝에 지난 17일 발표한 단속 결과, 농업법인 12곳은 지난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서귀포시 안덕면, 표선면 등 농지 2만4,270평(8만232㎡)을 사서 단기간에 되팔아 총 14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겼다. 허위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통해 이들 법인으로부터 농지를 샀다가 적발된 구매자만 188명에 달한다.

농업법인을 이용한 부동산 투기 적발 사례는 제주뿐만 아니라 세종특별자치시 등 최근 개발광풍이 불어 닥친 지역에서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다른 것도 아닌 농업의 도구가 농지침탈에 악용되는 현상은 시급히 막아야 할 사안이다. 농지 보호는 물론이거니와 정당하게 농사짓고 있는 많은 농민과 농업법인들의 명예와 자존감이 달려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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