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고추 ‘폭등의 역설’ … 가격 좋아도 농민은 운다

근당 가격 2만원 육박해도
작황 붕괴에 낼 고추 없어

  • 입력 2020.09.13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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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초록색도, 빨간색도 한 점 없다.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고추밭엔 누렇게 말라 죽은 고추가 바닥에 깔린 흙빛과 섞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벼는 살았지만 고추는 죽었다. 삼면이 논으로 둘러싸인 전남 영광 박영란씨의 고추밭은, 파릇파릇한 벼들 때문에 더욱 황량해 보였다.

4월 중순에 심어 아침저녁으로 덮어주고 영양제를 줘 가며 4개월을 넘게 돌봤지만 남은 것은 없다. 전남에 세 차례 쏟아부은 집중호우. 이미 2차 호우 때 박씨의 고추밭은 100% 피해를 입었다. 1,200평의 밭에서 단 한 개의 고추도 따지 못했다.

“이렇게 돼버리고 나선 아침에 눈을 뜨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열심히 해 놓고 이렇게 되니 내 잘못이 아닌데도 바보가 된 것 같고, (고추·고춧대를) 뽑아낼 엄두도, 내년 농사지을 의욕도 안 나요.”

지난 8일 전남 영광의 박영란씨와 황규집 이장이 수해로 황폐해진 1,200평 고추밭을 돌아보며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1차 호우를 겨우 넘기고 2차 호우에 100% 피해, 이후 고추를 뽑지 못한 상태로 팥을 재파했지만 이마저 3차 호우에 썩어 나간 상태다. 강찬구 기자
지난 8일 전남 영광의 박영란씨와 황규집 이장이 수해로 황폐해진 1,200평 고추밭을 돌아보며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1차 호우를 겨우 넘기고 2차 호우에 100% 피해, 이후 고추를 뽑지 못한 상태로 팥을 재파했지만 이마저 3차 호우에 썩어 나간 상태다. 강찬구 기자

‘풍년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풍년이 들어도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손해를 보는 현상을 말한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보면, 가격이 폭등해도 흉년 때문에 수확할 작물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흉년도 정도에 따라 손해의 차이가 있겠지만, 올해 고추농가들은 이 ‘폭등의 역설’을 호되게 경험하고 있다.

고추는 비에 매우 취약한 작물이다. 수확기에 임박해 50일 이상의 장마와 수차례의 물폭탄이 이어지자 고추는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전남 지역에선 첫 물, 두 물을 따고 올해 고추수확을 마무리하거나, 박씨처럼 100% 피해를 입은 사례도 드물지 않다. 그 와중에 비 맞은 고추에 두 번 세 번씩 방제를 하느라 투입비용 자체도 크게 증가했다. 근(600g)당 도매가격이 평년의 2배가량 올랐지만(1만8,000~1만9,000원) 전혀 웃을 수 없는 상황이다.

평년의 10~20%밖에 수확하지 못한 박씨 주변 농민들의 경우 2배가 아니라 5~10배는 높은 시세가 나와야 정상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계산이 된다. 수확을 못하는 박씨 같은 경우엔 당연히 시세가 100배 1,000배 뛴다 한들 소득이 0이다.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고 해서 상황이 넉넉지는 않다. 경북에서도 영주·봉화 등지의 고추는 최근 공판장에서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며, 상황이 양호하다는 다른 지역에서도 고추농사로 돈을 버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경북 의성의 고추농가 신창영씨는 “피해가 상당한 농가도 있고 그 와중에 잘 살린 농가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50% 이상의 피해는 있다고 본다”며 “낼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지난해 근당 8,000~9,000원씩 받던 것보다 지금 1만8,000원~1만9,000원씩 받는 게 오히려 소득이 못하다”고 한탄했다.

문제는 피해의 범위다. 고추는 농산물 중에서도 가장 노동집약적인 품목 중 하나로, 규모화가 어려워 수많은 중소농가들이 소규모로 나눠 재배하고 있다. 복합영농이 많은 탓에 다른 작목에서 손실을 메울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농가경제에 광범위한 피해가 닥칠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피해 이후 재파한 작목도 거듭 호우 피해를 입거나, 지금 와선 재파할 만한 작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손해를 줄일 길이 마땅찮다. 보험 가입률이 높다지만 피해를 100% 인정받는다 한들 그 보장 수준은 겨우 정상 매출액의 10% 이내다. 무엇보다, 폭증하는 중국산 수입으로 최근 고질적 폭락에 시달렸던 고추농가로서 모처럼 올라온 가격을 바라만 봐야 하는 현실이 얄궂다.

“이게 고스란히 다 빚이잖아요. 종자, 비닐, 지줏대, 비료, 영양제. 돈은 돈대로 들이고 한 해를 그냥 허비한 꼴이죠. 한창 바빠야 할 때인데 하루 일과가 없어지고 살아가는 낙이 없는 것 같아요.” 망가진 밭을 허탈하게 바라보는 박영란씨의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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