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재배 이행’ 취지 망각한 꾸러미 지원사업

  • 입력 2020.06.21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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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각 지자체의 학생 가정 농산물 꾸러미 지원사업이 당초 취지로부터 엇나가고 있다.

지난 4월 27일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당·정 협의체에서 합의했듯, 이 사업은 코로나19로 학교급식이 중단됨에 따른 계약재배 농가 피해를 줄이고 급식 계약 이행을 위해 추진됐다. 그러나 적지 않은 지역의 꾸러미 지원사업 과정에서 △학교측에 꾸러미 관련 결정권을 맡김에 따른 대기업 제품 등 가공품 위주의 꾸러미 구성 △그로 인한 엽채류·과일류 등 친환경농산물의 소외 △농협몰 이용 권장에 따른 가공식품·육류 위주 소비 우려 등의 문제가 거론되는 상황이다.

코로나19 이후 경기도 친환경농산물 6분의 1만 판로 확보

지난 15일 수원시 경기도의회 앞에서 열린 ‘경기도 가정꾸러미 파행 실태 규탄 및 친환경 학교급식 계약재배 농가 피해 대책 촉구' 기자회견 에서 김상기 경기친농연 회장(왼쪽)이 발언하고 있다.
지난 15일 수원시 경기도의회 앞에서 열린 ‘경기도 가정꾸러미 파행 실태 규탄 및 친환경 학교급식 계약재배 농가 피해 대책 촉구' 기자회견 에서 김상기 경기친농연 회장(왼쪽)이 발언하고 있다.

 

가장 문제가 심각한 지역은 경기도다. 지난 15일 경기도친환경농업인연합회(회장 김상기, 경기친농연)·친환경학교급식경기도운동본부는 수원 경기도의회 앞에서 ‘경기도 가정꾸러미 사업 파행 책임 경기도교육청 규탄, 붕괴 위기 친환경농산물 계약농가 지원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꾸러미 지원사업 과정에서 경기도교육청(교육감 이재정)의 ‘학교 자율선택’ 지침으로 인해 다수의 친환경 계약재배 농가들이 소외된다고 비판했다.

경기친농연에 따르면, 3~5월 도내 친환경농가들의 계약재배 총액 (학교급식이 정상 진행됐다면 받았어야 할 금액)은 약 71억5,000만원이었는데, 이 중 생협·마트 등으로의 판매, 친환경 꾸러미, 비(非)접경지 군납 등을 통한 판매금액은 12억원 남짓이었다. 전체 계약재배 물량 중 6분의 1만 판로를 찾았기에, 학교급식 중단에 따른 농가 피해액은 60억원에 달한다.

지난 8일 현재 경기도 내 학교급식 가동률은 전년 대비 42%에 그친다. 4월 당·정 협의체 발표 뒤 친환경농가들은 지난달부터 각종 유통망을 통한 판매마저 중단시키며 꾸러미 준비에 총집중했다. 그러나 12일 현재 경기농식품유통진흥원의 꾸러미, 즉 경기도 친환경 계약재배 농산물이 담긴 꾸러미는 총 1만7,700여개가 신청됐다. 경기도 내 초·중·고등학생 수가 약 169만명인 걸 감안하면 1% 수준에 그친다.

김상기 경기친농연 회장은 “(3월 이래) 개학과 등교가 2~3주씩 늦춰져 언제 학교급식 공급이 시작될지 알 수 없던 상황에서, 일반유통으로 판매도 못한 채 2~3주 간격으로 계속 농산물을 심었다 폐기했다를 반복했던 상황”이라며 “계약재배 농가의 책임생산만 강조돼 왔다가, 정작 학교급식이 중단되자 생산 의무를 다 해온 친환경농민들은 판로를 잃은 상황이다.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꾸러미에 대기업 가공품이?

왜 꾸러미에 가장 먼저 들어갔어야 할 친환경채소와 과일이 폐기돼야 했을까? 경기도의 경우, 경기도교육청은 꾸러미 지원사업을 시작하며 친환경농산물의 꾸러미 내 일정비율 포함 사항을 ‘권장사항’으로 규정했다. 지자체별 꾸러미 구성 및 선택은 지역별 학교운영위원회와의 협의를 통해 진행하기로 했다.

물론 이는 법에 따른 행동이긴 했다. 학교급식법 제2조는 학교급식 관련 제반사항의 결정을 “초·중등교육법 제31조에 따라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 또는 자문을 거쳐 학교의 장이 결정하도록 한다”고 명시한다.

문제는 학교운영위 측에만 결정권을 맡기면 꾸러미 구성·선택 시 친환경농산물은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육류 또는 가공품 위주의 식단을 선호하는 상황에서, 학교운영위원회가 이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이로 인해 경기도 내 대부분 지역에선 가공품 위주로 구성된 꾸러미가 늘어나는 상황이다.

예컨대 수원시와 광명시 꾸러미의 경우, 쌀을 제외한 나머지 품목 중 친환경 채소나 과일은 없다. 수원시 꾸러미의 경우 쌀 이외의 모든 내용물이 가공품 및 수산물(황태채·다시마·미역·된장·고추장·부침가루·김)로 구성됐다. 광명시 꾸러미는 총 10가지 품목으로 구성됐는데, 이 중 1차 농산물은 파주 친환경 쌀과 채소류 단 두 가지(대추방울토마토 500g, 오이 3개) 뿐이다. 채소류 두 가지는 광명시에서 생산된 일반농산물이다. 가공품 중 Non-GMO 우리밀 가공품이 포함된 건 의미가 있으나, 경기도내 친환경농산물이 쌀 외에 전무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부 지자체에선 대기업 제품 위주로 구성된 꾸러미도 등장했다. 안성시의 경우 경기농식품유통진흥원 꾸러미를 포함해 총 10가지 종류의 꾸러미가 마련됐는데, 이 중 네 가지는 냉동식품, 양념류 등의 가공품으로 구성됐으며 축산물 위주 꾸러미 두 가지, 수산물 위주 꾸러미가 한 가지다. 가공품 꾸러미 중 하나는 CJ의 비비고 군만두 및 고메 치즈크리스피 핫도그, 청정원 돈까스 등의 대기업 먹거리로만 구성됐다.

이는 경기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전광역시는 지난 16일부터 학생가정 농산물 꾸러미 배송을 시작했다. 대전 꾸러미엔 인근 충남·충북지역의 친환경 쌀·현미·잡곡이 기본으로 들어가고 각 학교에 따라 찰기장·찰흑미·찰보리 등이 추가된다. 철저히 곡물 위주로 구성된 꾸러미로 충남·충북의 친환경 채소·과일류는 포함되지 않았다. 초등학생 꾸러미에 학생 체험·관상용으로 채소씨앗을 동봉한 게 다다.

대전시 교육지원청 측은 이와 관련해 “(꾸러미 구성 과정에서) 학부모들의 자율 선택권을 보장하고자 의견을 수렴한 결과, 학부모들은 쌀·잡곡류 등 저장이 용이한 물품을 선호했다”며 “채소·과일류는 저장기간이 짧기도 하고 배송 과정에서 썩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학부모들의 의견을 반영해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쌀 밖에 없는 꾸러미

일부 지자체의 무성의한 꾸러미 구성 또는 꾸러미 품목의 다양성 부족 문제도 거론된다.

경기도 구리·남양주 일부 가정엔 다른 품목은 아예 없이 친환경 쌀과 찹쌀만 덩그러니 제공됐다. 남양주만 해도 유기농 채소 재배농가들이 적지 않음에도, 가공품 또는 저장이 용이한 농산물을 선호하는 학교운영위원회에만 품목 선택권을 맡김으로써 나온 결과물이었다.

경북 상주시의 꾸러미엔 친환경 쌀 4kg과 가지 3개, 오이 5개, 마늘과 느타리총이 포함됐다. 학교급식 중단으로 피해를 입은 농가들의 농산물을 꾸러미에 우선 포함시켰단 점에선 의미있으나, 농산물들이 제철 농산물이 아닌데다 다양성도 떨어진다.

오히려 같은 상주시 유치원 꾸러미에 포함된 방울토마토, 포도즙 등의 물품이 학생 가정 꾸러미엔 포함되지 않았다. 게다가 느타리버섯과 마늘엔 생산자 정보 표시도 돼 있지 않아, 이에 대해 상주 시민들이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김혜진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상주지회장은 “상주 관내에서 생산되는 엽채류, 과일류의 종류도 다양하고 이 농가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인데, 꾸러미 구성 과정에서 제철 채소, 과일이 포함되지 않은 게 아쉽다”며 “꾸러미 구성 과정에서 지역 제철 농산물 품목의 다양성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일부 지자체는 학부모들이 이야기하는 ‘다양성’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듯하다. 경기도는 5만원어치 꾸러미 공급과 함께 5만원어치의 농협몰 온라인 구매 포인트를 농협과의 공조하에 제공하기로 했다. 문제는 이 농협몰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먹거리 종류가 친환경농산물 뿐 아니라 일반농산물, 라면·통조림 등의 인스턴트 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성’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학부모 중 적지 않은 수가 상대적으로 조리가 쉬운 가공식품, 또는 아이들이 선호하는 육류 위주로 포인트를 사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소한 기존 급식 먹거리 비율대로

김병혁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정책위원장은 꾸러미 구성문제와 관련해 “최소한 기존 학교급식의 먹거리 비율에 맞게 구성해야 한다”며 “경기도처럼 꾸러미 5만원, 농협몰 구매 포인트 5만원씩 지급할 거라면 친환경농산물 30%, 육류 30%, 가공식품 40%씩 균형을 맞췄다면 친환경농가들도, 학교운영위원회도 공감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고민 없이 무조건 학교운영위원회에 결정권을 맡기는 경기도교육청의 방식이 옳았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채소·과일류의 저장 및 운송 과정에서의 관리가 어렵다는 점, 꾸러미 구성 및 선택권을 학교 측에 일임하는 게 법적 근거로 이뤄진 결정임을 감안해도, 최소한 품목 구성 과정에서 농가 의견의 반영 또는 농민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농민·학부모·영양교사 간 소통 창구 개설 등의 과정은 필요하지 않냐는 게 대다수 친환경농민들의 입장이다.

경기도 한 도시에서 채소류를 재배하는 친환경농민은 “아무리 우리 지역의 농가가 소수라 해도, 소수기에 오히려 더 친환경 채소류의 꾸러미 포함은 어렵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 지역의 꾸러미는 거의 가공품 일색으로 구성됐다”며 “꾸러미 구성 과정에서 농민의 의견이 함께 반영될 구조가 없었던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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