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가구 대추리 주민, 꿈 잃고 어렵게 살아

“밥을 먹어도 마음 편하게 벌어먹고 싶어”

  • 입력 2016.07.15 11:31
  • 수정 2016.08.13 11:03
  • 기자명 김은경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김은경 기자]

대추리는 1942년 일본군대의 비행장 건설과 1952년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두 번의 강제이주를 당했다. 쫓겨난 주민들은 갯벌을 간척해 마을을 만들었으나 2006년 5월 미군기지 확장으로 세 번째 이주를 당한 것이다.

2010년 10월 30일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로 이주한 ‘대추리 평화마을’ 44가구 주민들은 황새울 기념관 입구에 “우리의 싸움은 헛되지 않았고, 아름다운 저항이었다”고 썼다. 이주 직전까지 인근 송화리에 있는 임시거주지로 마련된 빌라에서 생활했다. 평화마을은 외국의 전원주택처럼 아담하고 예쁘게 조성돼 주변에서는 정부에서 이주단지를 전부 조성해준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정부에서 실질적으로 지원해준 것은 마을도로와 회관, 기념관, 농기계 보관창고 등의 기반공사정도다. 주민들이 대추리의 수많은 전답을 팔아 고작 얻은 것이 집 한 채 정도. 빚을 얻어 집을 지은 주민도 많다. 신종원 대추리 이장은 “주민들중 3분의 1이 1억 원 정도를 주고 집터 200평과 밭 100평을 사고 나니 정작 집 지을 돈이 없었다”며 “융자를 얻거나 자식들한테 빌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내막이 이렇다보니 농사지을 땅과 농기계를 산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에 마을 내부에서는 농기계 보관창고에 농기계들도 공유하려 했지만 현재 신 이장을 포함 전 이장만이 농사를 짓고 다른 주민들은 공공근로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주민 지원 사업을 위해 통과된 조례안에 따라 65세~75세 사이의 주민은 공공근로대상이지만 이달에 끝나 생계도 막막한 상황.

농민으로만 살았던 대추리 주민들은 농사짓고 싶은 한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임시거주지로 마련된 근처 송화리 빌라에서 살았을 때는 빌라 앞 화단에 심겨진 잔디를 다 뽑고 벼를 심기도 해 그곳 주민들의 불편민원도 있었다. 신 이장은 “주민들이 얼마나 일을 하고 싶었겠냐”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한시간 남짓 떨어진 충남 아산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는 이유도 농사를 짓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평화마을 주민 송재국(79) 씨는 “제일 중요한 건 밥을 먹어도 마음 편하게 벌어먹고 사는 것”이라며, “주민들 중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한명도 없고, 치매가 걸려 병원에 가 있는 등 거의 올바른 생활을 못하고 있다”고 이웃들의 근황을 전했다.

한편, 평화마을은 2012년 9월 대추리역사관 ‘달구름’을 개관했다.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마을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긴 싸움의 시간동안 언론에서 왜곡 보도된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신 이장은 “꼭 우리의 투쟁, 아픔의 역사보다 마을 주민 전체가 소중히 했던 순간들의 앨범을 토대로 만들었다”며, “타지에 사는 가족들도 새로운 공간이 마련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숭고한 싸움은 아직도 고난과 아픔으로 점철돼 있다. 하루가 다르게 고령화되어 가는 주민들에 대한 생계대책마련이 시급하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