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농사짓자!’가 투쟁구호였던 마을공동체는 산산이 붕괴됐고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삶의 근간이 뿌리째 뽑혀나갔다. 팽성읍 노와리에 있는 ‘대추리 평화마을’에서 만난 송재국(79) 씨의 지난 10년은 땅을 빼앗긴 농민들의 고통을 줄곧 말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눈에 비친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땅은 농민에겐 떼려야 뗄 수 없는 피붙이 같은 것임을 실감했다.
송 씨는 대추리에서 30년을 살았다.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력해 땅을 장만해 벼농사만 7,500평을 지었다. 그는 “대추리는 상당히 따뜻하고 좋은 부락이었다”며 “일개 마을로는 제일 컸는데, 모심을 때도 작업반을 4개로 나눠 서로 잘하려고 경쟁하듯 도와가며 살았다. 호박이나 김치를 썰어놓고 부침개를 해도 꼭 이웃끼리 나눠먹었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평화마을로 이주해온 44가구는 끝까지 싸움을 했던 주민들 100여명이다. 송 씨는 “대추리 사람들이 상당히 온순한 성격이었는데, 4년간 미군과 정부를 대상으로 싸우면서 성격들을 다 버리게 됐다”며 “예전처럼 온화한 맛이 없고 농담도 잘못하면 싸움으로 번지는, 그런 환자들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나가다 논밭만 봐도 화병에 시달렸다. 못자리할 때는 더욱 심했다. 송 씨는 “모심는 거 보고 있으면 속에서 막 불이 났죠. 수확할 때도 불나고. 지금은 그런 마음이 조금 가시는 시기이기도 한데…. 벼가 누렇게 익으면 또 그냥 다 내 것처럼 속이 뒤집힌다”고 했다.
다른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은 2010년 10월 평화마을에 정착하기 전 팽성읍 송화리 임시거주지로 마련된 빌라에서 3여 년간 살았다. 매일 새벽 4시 즈음 깨어난 주민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보상을 많이 받아 부자동네라는 소리도 들려왔다. 남의 속도 모르는 터무니없는 소문들이었다. 송 씨의 경우 보상금으로 집터 200평과 밭 100평을 사고, 살 집까지 짓고 나니 대부분의 보상금이 사라지더라는 것.
현재 대부분의 주민들은 공공근로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마을에 가서 도로의 쓰레기를 줍거나 풀을 깎는 일이었다. 한 달에 100여 만 원을 벌었던 송 씨는 “피를 토하는 일이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마저 이달 종료될 예정이라 주민들은 이후 생계 또한 막막하다. 주민들 60%정도가 70~80대 고령이며 7분의 1정도는 독거노인이다. 모가 자라는 것만 봐도 고통일 수 있는 삶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