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워둔 상표 일방적 회수 … 다국적 농약 원제사 ‘갑질’ 논란

바이엘, 경농에 ‘데시스’ 원제 공급 중단·상표권 회수
농약 원료 대부분 수입 의존 … 국내 원제 개발 필요

  • 입력 2016.05.08 21:13
  • 수정 2016.05.08 21:22
  • 기자명 안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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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안혜연 기자]

해외 농약 원제사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국내 농약 제조업체에 횡포를 부리고 있어 업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국내 업체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한 제품의 시장 입지를 다져 놓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해외 원제사가 상표권을 회수해 자체 상품으로 출시해버리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 현재 우리나라 농약 제조업체는 거의 모든 원료를 해외 업체에서 수입 중이며, 이로 인해 다국적 원제사는 국내 업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 경농 데시스 제품(왼쪽)과 바이엘크롭사이언스 데시스 제품 로고(오른쪽).

지난해 8월 27일, 다국적 농약 원제사인 바이엘크롭사이언스는 국내 농약 제조업체 (주)경농에 원예용 종합살충제 ‘데시스’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했다. 통보 내용은 △올해 7월부터 경농에 데시스 원료를 공급하지 않으며 △경농은 재고품 판매를 제외한 데시스 상표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협의 없이 이뤄진 일방적인 통보에 경농은 37년간 키워온 자사 대표 제품을 하루아침에 잃게 됐다. 

경농과 바이엘이 데시스 제품 계약을 체결한 것은 지난 1980년으로, 바이엘은 경농에게 데시스 원제를 독점공급하고 데시스 상표명을 독점사용하게 했다. 이후 양사는 업계 관행대로 계약이 자동적으로 연장되는 것으로 상호 이해해 왔다. 

하지만 바이엘이 계약 해지를 통보하면서 경농은 올해 7월부터 데시스 상품 판매가 불가능하게 됐다. 다른 업체에서 원료를 공급받아 대체제를 생산하더라도 데시스 상표명은 사용할 수 없으며, 이전의 인지도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계약 해지를 통보한 바이엘은 자체적으로 데시스를 제조, 올해 1월부터 동일 상표명으로 시중에 판매하고 있다. 

경농의 한 관계자는 “1980년 계약 이후 경농은 실험, 마케팅 등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데시스 브랜드 가치를 높여왔다. 하지만 바이엘은 어떠한 사전 협의도 없이 국내 기업이 쌓아왔던 것을 한 순간에 뺏어갔다”며 “바이엘과 국내 제조회사 간 계약 시 계약기간과 계약해지 조건 등이 명확히 명시되지 않은 채 바이엘에 유리한 조건으로 불공정 계약이 이뤄졌다”고 비판했다. 

또 경농은 바이엘이 올해 1월부터 데시스를 출시한 것도 계약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농 관계자는 “바이엘이 계약해지를 통보했지만 올해 6월 30일까지는 경농에 상표권 독점 권한이 있다. 하지만 바이엘은 올해 초 동일한 상표명의 제품을 출시했다”고 꼬집었다. 

반면 바이엘 측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바이엘은 최근 해명자료를 내고, “최근 몇 년간 데시스 매출이 지속적으로 감소해 브랜드의 위상이 악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이에 바이엘은 직접 사업을 통해 브랜드 강화와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며 “이미 계약서 상의 공급계약 기간 만료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원제를 경농 측에 공급해왔다”고 반박했다. 

경농은 이번 사태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 제소 및 손해배상 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공식적인 제소는 5~6월 안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경농 관계자는 “바이엘에게서 원제를 공급받는 업체 입장에서 이번 결정은 절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국적 원제사의 횡포가 계속되고 있어 후환이 있더라도 행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국적 기업 횡포, 처음 아냐 

이와 같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경농은 지난 1989년 4월 바스타 액제를 등록하고 각종 마케팅으로 1997년에는 105억원의 매출액을 올릴 정도로 시장 규모를 성장시켰다. 하지만 2002년 바이엘은 상표사용권과 원제공급을 중단하고 바이엘 자체 상표 바스타 액제를 출시했다. 

한국삼공이 지난 1996년 3월 등록한 리전트 세립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삼공은 이 제품으로 한 때 127억원의 매출액을 올렸으나, 2000년 초 바이엘은 원제공급을 중단하고 자체 상표 리전트 세립제를 출시했다. 

팜한농이 지난 1981년 3월 등록한 안트라콜 수화제, 1993년 3월 등록한 코니도 입제, 1995년 3월 등록한 실바코 수화제도 모두 약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잘 나가는’ 자사 제품이었지만, 현재는 바이엘이 동일 상표명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상표권을 회수당한 국내 업체는 새로운 상표를 개발하기 위해 수십억원의 비용을 다시 투자해야 한다. 

바이엘, 신젠타 등 다국적 농약 원제사는 원제 공급 계약 체결과 동시에 해당 업체가 자신들의 상표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상표를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기 위한 전략이다. 예컨대 바이엘로부터 데시스 원료를 공급받는 다른 나라 기업도 자체 상표명이 아닌 ‘데시스’로 제품을 출시해야하는 식이다. 국내에서 제조한 농약 제품명 대부분이 영어인 이유도 바로 이것. 

국내 원제 개발 중요성 

다국적 농약 원제사가 갑 행세를 할 수 있는 원인은 우리나라 농약 원료 수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데 있다. 국내 업체의 수입 원료 의존도는 95% 이상이고 국내에서 개발한 원제는 6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국내 업체가 원제 개발에 소홀했다고 비판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자본 규모가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기 때문. 국내 농약 시장 규모는 약 1조6,000억원이지만 바이엘크롭사이언스 한 업체의 연 매출은 약 20조원이다. 매출액의 10%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치면 국내 업체를 모두 합쳐도 1,600억원, 바이엘은 2조원을 투자하는 셈이다. 원제 하나를 개발하는 데는 10~20년이 걸리고 수천억원이 소요된다. 

그럼에도 국내 원제 개발이 중요한 이유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로 인한 피해가 농민에게까지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농약 제조업체의 한 관계자는 “지금 당장은 업체 사이의 싸움일지 몰라도, 향후 한 원제에 대한 독점 판매가 가능해진 다국적 기업이 농약 가격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며 “또 다국적 기업은 전 세계 농민들을 고객으로 한다. 당연히 국내 기업에 비해 우리나라 토양·기후나 재배 경향에 맞는 제품 연구를 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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