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료, 오래 전 가슴에 묻은 이야기

  • 입력 2014.02.07 13:38
  • 기자명 조경희 김제시농민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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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희 김제시농민회 사무국장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4년에 농민운동가의 삶을 꿈꾸며 학창시절 농촌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전북 김제에서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건강한 몸과 열정 하나만으로 시작한 농촌의 삶이었지만 지역의 농민회원들과 마을의 어르신들의 도움으로 다섯 필지(6,000평)의 논을 얻어 첫 해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1필지 당 9가마씩의 소작료를 후불로 주기로 하고, 필요한 농자재는 마을 이장님의 이름을 빌려 농협에서 외상으로 구입해 사용하고 연말에 갚기로 하여 어렵사리 시작한 농사일이지만, 당장은 아무런 밑천 없이 일 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6,000평에서 거둔 수확은 쌀로 약 110가마. 현재의 지역 평균 생산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시의 평균 생산량은 되었으니 첫 해 농사치고는 성공적인 수확을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일 년 동안 농사에 들어간 비용과 소작료를 계산하다보니 수확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들어간 비료와 농약 등 농자재 비용과 위탁 농기계 삯이 1필지 당 보통 5가마가 들어 전체적으로 25가마가 생산비용으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 소작료로 45가마를 논 주인들에게 주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것은 겨우 40가마라니….

어떻게 농사를 지은 나보다 논 주인이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는 건지 황당함을 넘어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그 때 머릿속을 채웠던 많은 생각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이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한다. 혹독한 수탈에 시달리던 일제 강점기에도 소작쟁의를 통해 소작농들의 권리를 찾았는데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런 부당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인가?’

지역의 형님들과 선배 농민활동가들을 만나서 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마치 입을 맞춘 것 마냥 한결 같았다.

‘전부터 내려온 관행이니 어쩔 수 없다.’ ‘사유재산이라 국가라 해도 강제로 조정할 방법도 없다.’ ‘과거에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 명의 지주에 여러 명의 소작농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으니 단결하여 싸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지주도, 소작농도 다양하게 얽혀 있으니 단결하여 투쟁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농민들끼리 한 필지라도 더 지으려고 서로 경쟁하는 마당이니 문제제기 자체가 어렵다.’ 등 결론적으로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때로는 이제 막 농사지으러 내려온 녀석이 지역의 분란을 일으킬 엉뚱한 궁리부터 하고 있다는 핀잔도 들었다.

결국 그렇게 끓어올랐던 분노는 ‘내가 농사를 지으며 농민운동가로 사는 한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한다’는 오기서린 결심과 함께 가슴에 묻어두었다.

그로부터 5년 후 나는 다섯 번째 농사를 지었다. 농사의 규모도 12필지로 늘었고 농사를 시작한 첫 해 한가마에 10만원이던 쌀값은 16만원으로 올랐다. 농사조건도 많이 좋아졌다. 농로가 포장되고 용배수로가 정비되어 일하기가 좋아졌고, 벼도 미질이 뛰어나면서 다수확도 가능한 품종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농사조건이 좋아진 것을 이유로 지역의 소작료가 어느 순간 10가마로 올라 있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 때문에 소작료가 올랐는지 알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었다. 다만 정부가 추진한 쌀 전업농 제도를 통한 규모화와 이에 따른 지원 정책이 오히려 경쟁을 부추겨서 나타난 결과이거나 농민들에게 지급되는 고정직불금을 이유로 논 주인들이 은연중 소작료 인상을 요구했을 것이라는 추측뿐이었다.

그래도 지역의 농민들은 모두가 피해자인양 혹은 공범인양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또 다시 몇 년이 흘렀다. 쌀값은 오르기는커녕 오히려 12만원대로 곤두박질 쳤다. 농민들은 쌀값하락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고 정부는 변동직불금이란 명목으로 농민들의 소득감소에 대해 생색내기 처방을 했다. 그러나 지주들 또한 쌀값 하락에 따라 손실을 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쌀값이 16만원 일 때 10가마의 소작료 수입은 160만원이었지만 쌀값이 12만원대로 떨어졌으니 같은 10가마의 소작료를 받아도 30만원 이상의 소득감소가 발생한 것이다.

소작농에게 소작료에 해당하는 10가마만큼의 변동직불금을 내 놓으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고 최소한 쌀값이 떨어지기 전과 같은 금액이 되도록 소작료를 두가마니 올려 달라는 요구가 소리도 소문도 없이 지역에서 나타났다.

결과는 또 그렇게 언제 어디서 누구 때문에 올랐는지 확인할 길 없이 지역의 소작료가 지주들의 요구대로 12가마로 올라있었고, 늘 그렇듯이 지역의 농민들은 제각각의 억울함을 가슴에 묻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현실을 받아들였다.

지난 2013년 가을, 나는 첫 해 농사를 시작한 이후로 20번째 벼농사를 마쳤다.

쌀값은 15년 전과 같은 16만원이건만, 1필지 당 소작료는 9가마에서 3가마가 늘어난 12가마, 생산에 따른 비용은 해마다 올라 20년 전 1필지에 50만원 정도였던 것이 지금은 세배가 넘어 현재 쌀값으로 계산해도 170여만원, 즉 10가마 정도가 들어간다.

한 필지에서 땀 흘려 생산한 쌀 25가마. 그중에 생산비용으로 들어간 10가마를 제하면 15가마가 남고 그중의 12가마를 논 주인에게 주고나면 나에게 돌아오는 수확은 고작 3가마….

이 슬픈 현실을 과연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커다란 인심을 쓰며 지급하는 것 같은 몇 푼의 고정직불금을 위안삼아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농민의 삶인가?

20년 전 가을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억울함과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는 바로잡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싸울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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