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농민운동의 매운 기개 - 음성의 정용기

  • 입력 2013.01.11 14:44
  • 기자명 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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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위해 여러 원로 농민운동가들을 만나며 안타까운 점 하나는 많은 분들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연세가 있으니만큼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더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더하곤 했다.

오늘 만나볼 정용기 선생 또한 3년 전에 뇌졸중이 와서 두 번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다. 긴 투병 생활에 우울증까지 겹쳐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감정이 심하게 일렁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의도 농민 대투쟁 때 함께 KBS 차량에 불을 지르고 소방차의 호스까지 뽑아버린 이야기를 들려줄 땐 아득한 젊은 날을 떠올리는 듯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기억력이 많이 쇠퇴하고 표현할 단어를 찾느라 한참씩 말씀이 끊어지기도 했지만, 두어 시간 넘게 선생은 안간힘으로 자신의 생애를 들려주었다.

자연스럽게 만난 농민운동

정용기는 1946년에 태어났다. 우리 나이로 68세, 요즘 농촌에서는 아주 노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나이다. 지금 살고 있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원래부터 그의 집은 방앗간을 했다. 어렸을 때는 살림이 어려웠지만 방앗간이 자리를 잡으면서 밥걱정은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10남매 중 넷째다. 아직 형제들 모두 생존해 있는 복된 집안이기도 하다. 금왕읍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살던 큰 형에게로 가서 대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학교 공부보다는 자꾸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한창 경제개발을 외치던 박정희 정권은 기술을 배우는 게 산업역군이 되는 길이라며 선전에 열을 올렸다. 공부로 서울내기들을 따라가기 벅찼던 정용기는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마침 형이 세든 집의 주인이 나전칠기 기술자였다.

▲ "왕복 80리 길을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몰랐어. 그리고 나는 그렇게 싸우는 게 재미있더라고"
당시 나전칠기 기술은 세계에 자랑할 우리의 전통 공예로 인정받고 있었다. 마치 주요 수출품이라도 될 듯한 분위기였다. 결국 정용기는 학교를 그만 두고 나전칠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3년쯤 기술을 익히고 장사를 하며 모진 고생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일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값싼 가구들에 밀려 나전칠기는 이미 사양 산업으로 변했던 것이다.

얼마 안 가 군에 입대한 그는 베트남전 막바지에 2년 가까이 참전했다. 인사계였던 덕분에 비교적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하고 귀국할 때 냉장고와 텔레비전을 사들고 왔다. “그 때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들어온 것이여. 우리 집이 방앗간이니까, 마당이 넓었지. 저녁이면 그놈을 밖에 내다 켜고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모여서 보곤 했어.” 정용기는 대처로 나간 세 형을 대신해 본격적으로 방앗간 운영과 농사에 뛰어들었다.

벼농사와 담배 농사를 하며 농촌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던 이십대였다. 그가 농민운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군대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제대하자마자 인연이 된 옆 마을의 여자와 결혼을 했다. 지금껏 반려이면서 동지로 살아온 아내였다. 처가 쪽 촌수로 치면 아내의 조카뻘 되고, 정용기에게는 이웃마을의 형님인 최재명씨가 찾아왔다.

그는 초기 충북 가농운동의 중요한 멤버이자 나중에 세계 최초로 우렁이농법을 창시한 사람이기도 했다. 정용기의 생각이 바르고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는 그는 농민운동에 함께 할 것을 권유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비록 대여섯 명에 불과했지만 사랑방 모임을 통해 매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최재명, 최재근, 유사혁, 정용기 등, 몇 년 후 농민운동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해낼 젊은이들이 그렇게 만났다.

부당농지세를 거부한다!

농지세는 땅에 작물을 심어서 얻은 이익금에 부과되는 일종의 소득세로서 도시근로자의 근로소득세와 비교될 수 있다. 그런데 농지세는 농사비용과 자가 노임 및 토지용역비 등 생산비를 제외한 순소득에서, 평균생활비를 보장하는 기초공제액을 뺀 나머지 금액에 부과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것과 상관없이 정부에서 정한 소득 표준율에 따라 공무원이 임의로 부과하여 밑지는 농사에 빚을 지고도 고율의 세금을 내야만 했다. 또 농민에게 적용되는 기초공제액은 도시근로자들의 근로소득세에 적용되는 기초공제액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아 조세형평의 원칙에도 맞지 않았다.

이에 가농은 전국적으로 농지세 학습과 자진신고운동을 전개했다. 가농의 교육과 지침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먼저 투쟁에 나선 곳이 바로 음성 가농이었다. 1980년 겨울에 음성지역 고추재배농민들은 ‘부당농지세 시정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농지세의 부당성을 알리는 마을교육을 실시했다. 1981년 봄부터 고추생산비 조사활동과 수확 후 농지세 자진신고 및 이의신청 활동을 조직적으로 펼쳐 나갔다. 그리고 부당농지세 시정투쟁대열을 확산시키고 결의를 높이기 위한 농지세납부거부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온갖 탄압과 회유가 들어왔지. 빨갱이라는 모함에, 새마을사업을 취소하겠다는 협박에, 얼굴 아는 공무원들이 와서 회유도 하고. 그래도 꿈쩍하지 않고 밀고 나갔어. 농민들이 크게 호응해주니까, 힘이 났던 거지.” 음성지역 농민들은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82년 3월에 ‘부당농지세시정 농민대회’를 개최했다.

2,000명이 넘는 농민이 서명에 동참하고, 1,500명 이상의 농민이 저지선을 뚫고 운집했다. 이는 광주를 피로 진압한 군부정권 치하에서 최초로 성공적으로 일어난 민중집회였다. 비록 언론의 통제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집회의 성공은 억눌려있던 전체 민족민주운동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이 날의 의미는 크다. 이날의 투쟁은 곧 있을 농민운동의 새로운 고양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의 집단적인 농지세 납부 거부운동은 마침내 1984년 가을 정기국회에서 농지세법을 개정하는 성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투쟁으로 음성은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농민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사실 여기에 가농 회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어. 그런데 다들 농민들하고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고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농민들의 호응이 아주 컸지. 그리고 역시 성당에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어.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이 참 많이 도와주었고.” 한 해에도 수십 번씩 시위가 일어나곤 했다.

부당한 일이 있을 때마다 농민들은 가농의 선도에 따라주었다. 나가자고 하면 한 마을 주민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집회에 참석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신나던 나날이었다. 1985년에 벌어진 소몰이 투쟁은 가장 기억에 남는 싸움이었다.

소와 농민과 경운기의 대장정

음성군에서 소몰이 시위가 벌어진 것은 1985년 7월 12일이었다. 열흘쯤 전에 경남 고성에서 벌어진 게 최초이고 음성이 두 번째였다. 새벽부터 각 마을에서 농민들이 금왕 천주교회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음에도 농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서 무려 16Km나 떨어진 음성군청을 향해 출발했다.

100여 명의 농민과 여덟 마리의 소, 경운기 17대로 이루어진 행렬은 장엄하면서도 비장했다. 비를 흠뻑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농민들은 ‘소값 피해 보상하라!’라는 머리띠를 둘렀고 경운기에는 ‘외국 농축산물 수입 중단하라’ 등의 요구가 적힌 만장 이십여 개가 꽂혀서 나부꼈다.

앞장서서 나가는 소의 등에도 ‘개 값된 내 신세’, ‘소 값 보상하라’ 등의 글귀가 쓰인 양곡포대가 씌워져 있었다. “완전히 길을 막고 가는데, 마지막으로 지나온 택시가 우리한테 어디어디에 경찰들이 진을 치고 지키고 있다, 이렇게 알려주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미리 다 알고 기세 좋게 앞으로 나갔지. 얼마쯤 가니까, 전경들이 나타나서 시비가 붙었어. 정보과장이란 자가 가로막고 나서길래, 막지마라, 너네들이 소 값 물어주지 않으려면 막지마라, 그랬더니 나서지를 못하더라고.” 1차 저지선을 뚫은 다음에는 경운기로 도로를 완전히 점거하고 전진해 나갔다.

세 차례에 걸쳐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결국 세 시간 만에 음성 읍내에 진입하게 되었다. 함빡 비에 젖어 춥고 배가 고팠지만 사십 리 행진을 성공적으로 마친 감격은 컸다. 더구나 장날에 모인 음성군민들은 소를 몰고 시위에 나선 농민들을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어느 노인은 “내가 평생 농사지으면서 가슴에 맺힌 한이 오늘에야 조금 풀리는 것 같소. 참 고맙소.” 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즉석에서 농민회원이 되겠다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음성 시가지와 장터를 한 바퀴 돌며 연설과 농민가 등을 부를 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농민들의 기세에 놀란 군수는 소 피해가 보상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오후 세 시, 군수의 약속과 앞으로의 사태를 주시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농민들은 승리가를 목청껏 불렀다. 그리고 다시 경운기 시동을 걸고 금왕으로 향했다. 전쟁에서 승리를 얻고 돌아가는 것 같은 감격이 가슴에 요동쳤다. 도로변 마을 사람들도, 지나가는 차량들도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며 농민들을 응원했다.

참으로 신나고 가슴 벅찬 승리였다. “그 행렬이 한 200 미터쯤 되었어. 왕복 80 리 길을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몰랐어. 그리고 나는 그렇게 싸우는 게 재미있더라고.” 가농 전국 부회장에 이어 전농 부의장으로 전국을 다니며 투쟁 현장에는 늘 앞장서서 싸웠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힘이 넘쳤다. “그 언젠가 볏가마니 싣고 서울로 올라갈 때, 전경들이 고속도로에서 지키니까, 우리가 갈 수가 없었지. 그래서 톨게이트 빠지는 데서 그냥 다 드러누워 버렸어. 몇 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하니까, 난리가 났지. 그러니까 형사들이 날름 들어다가 저희 차에다 실어. 그러면서, 형님 여기 편하게 계셔요, 하는 거야. 뭐, 잡히면 사실 특급 대우지. 다들 서로 지역에서 얼굴 알고 마주치며 사는 처지니까. 그때는 싸우면서도 그런 게 있었어. 지금은 아주 삭막해졌지만.” 옛일을 떠올릴 때면 어눌했던 어조가 새삼 활기를 띠었다.

그만큼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일지도 몰랐다. 비록 엄혹한 정권이었고 투쟁의 강도는 훨씬 더했을지라도 오히려 그 때가 지금보다 더 희망이 있었다고 했다. 그에게 다시 농촌 현실에 대해 물었더니, 깊은 한숨이 먼저 돌아왔다. “이제 농촌은 끝났어. 한미FTA로 끝났고 한중FTA가 되면 최종 사망선고만 남는 거지. 지금도 중국 농산물이 판을 치는데, 그것이 홍수처럼 밀려오면 무슨 수로 당할 것이여? 아무 대안도 없이 농민들 죽으라는 소리지. 지금 소 값 폭락하는 거 봐. 농민들이 살 수가 없어.” 현 정부의 농업 정책을 강하게 질타하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 것은 손자들 이야기를 할 때였다.

하나뿐인 아들은 수원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데 손자손녀를 셋이나 안겨주었다며 아직 어린 손자 자랑을 한다. 비로소 인자한 할아버지로 돌아온 그, 필자에게도 연신 사과와 배를 권하며 맥주 캔까지 하나 따준다. 자신은 병 때문에 술을 끊은 지 오래란다.

농민운동에 함께 헌신했던 아내는 요즘 용역업체를 통해 일을 다닌다고 했다. “굶어죽을 정도도 아니고, 정 급하면 땅을 팔아서라도 그냥 살라고 하는데도 자꾸 일을 나가. 그런데 안식구 말이, 농민은 땅을 사는 거지 파는 게 아니라고 하는구만. 매일 나가서 4~5만원 버는 재미를 붙였나봐. 제 몸 축나는 줄 모르고.” 빈 집을 혼자 지키는 선생의 노년이 어쩔 수 없이 쓸쓸해 보였다.

지금도 여전히 지역의 현안에 열심히 참여하시는 선생이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를 빈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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