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 대한 기억

  • 입력 2012.11.04 19:07
  • 기자명 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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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잡지를 뒤적이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칼럼 하나를 발견했다. 1989년 연초에 발간된, 당시에 뜨거웠던 노동문제를 문학적으로 다루는 잡지였다. 새해를 맞아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인사 형식의 글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노동자들은 가혹하게 자본과 구사대에 얻어터지고 있었다.

노대통령의 칼럼 제목은 ‘새해 복 많이 쟁취하십시오’였다. 지금 들으면 좀 우습기도 하고 막 초선의원이 된 국회의원으로서 치기조차 느껴지면서 노동자에 대한 애정과 친밀함이 배어있는 제목이기도 하다.

짧고 당시의 노동문제를 몇 가지 짚고 있었지만 내용이 뛰어난 글은 아니었다. 다만 글의 마지막 문장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다 함께 나아갑시다’ 였다.

새삼 그의 대선구호였던 ‘사람 사는 세상’이 대선에 임박해서 만든 깜짝 구호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논란이 있고 그를 보좌했던 이들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이명박 치하 5년을 겪다보니 역시 그만한 대통령이 없었다는 느낌이다.

내가 겪은 가장 긴 대통령은 박정희다. 유신으로 제2의 쿠데타를 일으킨 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중학교 이학년 때 그가 죽었으니까, 무려 8년 동안 고스란히 유신 교육을 받고 자란 셈이다.

월요일마다 국민교육헌장 낭독으로 시작되던 애국조회, 차렷과 ‘앞으로 나란히’를 거듭하다가 발맞추어 걷던 교련조회, 점심시간마다 벌어지던 혼식검사, 국기에 대한 맹세, 일요일이면 빗자루를 들고 나가야 했던 조기청소의 기억들이 내게는 남아있다.

간혹 나치 독일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다가 유겐트(소년단)의 모습이 나올 때면, 그 광경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그랬다. 박정희는 우리를 유신의 유겐트로 키우려 했다.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붉은 악마로 선전된 ‘북괴군’을 그림으로 그리고,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니, ‘초전 박살’이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다.

불과 여덟 살의 나이부터 사춘기가 무르익던 열다섯 살까지 끔찍하고도 잔인한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내 안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런 불구의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입은 피해는 계량할 수조차 없이 크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올바른 교육을 받았더라면 우리 세대는 훨씬 더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

두 번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고교생이던 우리에게 교복과 두발을 자유롭게 해주고 학원을 금지시킨 고마운 대통령이었다. 그 덕에 다방을 드나들고 여름날이면 생맥주 집에서 노닥거리는 재미도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연좌제를 폐지하여 집안의 족쇄를 풀어주기도 했다. 하여, 나도 아버지도 전두환을 미워할 건덕지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그의 진짜 모습을 알기 전에는. 나는 전두환을 반대해 싸웠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도 싸워야 했다. 유치장을 들락거리고 수배를 받으며 결국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어려운 시골살림으로 장남을 대학에 보낸 터에 그 지경이 되었으니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결국 내 삶의 두 번째 대통령이던 전두환도 내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자가 되었다.

노태우가 집권했던 오 년은 해외에 나가 있다가, 어떤 활동 때문에 이적단체 구성원이 되어 귀국길이 막혀버렸다. 당연히 원한이 깊다. 김영삼 때 비로소 해금이 되어 귀국했고 급변한 분위기를 핑계로 시골에서 은거하듯 여러 해를 보냈다. 그리고 더 이상 대통령 따위 때문에 내 삶이 흔들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2002년에 어마어마한 붉은 악마들이(초등학교 때 그렸던 그 붉은 악마들이) 떼를 지어 광화문에 출몰하는 장관을 보고 유신의 망령이 되살아날 일은 없으리라 안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삽질에 도통한 자를 이어 유신의 망령조차 다시 어른거리는 세월이 되고 말았다. 그 악랄하고 잔인했던 시대에 사법의 이름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줄잡아도 100명이 넘는다. ‘아버지의 복권’을 위하여 딸이 나선다는 말에는 피비린내가 난다. 이건 삽질과는 차원이 다른 역사의 문제다. 오호 통재라!

 

글_최용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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