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수구보수 세력이다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⑥

  • 입력 2007.10.06 19:08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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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날 저녁에 불알친구들 여나믄 명이 시내 술집에 모였다. 자식들 공부에 등골이 빠지는 50대 초반의 가장들은 안주가 나오기 전부터 열심히 소주잔을 뒤집었고 차례주의 여진이 남아 있던 터라 불콰하게 취기가 올랐고 장바닥처럼 목소리가 커졌을 때에는 정치/경제/교육을 두루 섭렵한 뒤였다. 당겨 앉았던 술상에서 엉덩이를 뒤로 물리면서 누군가가 말했다.

“어이, 촌놈! 올해 복상 돈 좀 샀나?” 복숭아 얘기가 나오자 그 지긋지긋했던 8월 장마가 떠올라 나는 얼굴을 찡그렸고 그만 심사가 뒤틀려 죄 없는 친구에게 삐딱해졌다.
“너그 형님 능금밭 2천 평 그걸 내가 사고 싶은데 한번 물어봐 줄래?”

그 말에 누구는 입을 쩌억 벌렸고 누구는 거짓말 하지 말라고 퉁박을 놓았고 또 누구는 비감한 어조로 농촌을 걱정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미 자유무역협정 얘기가 나왔고 찬반양론으로 술자리가 다시 열기를 뿜었다. 나는 시들해져 담배만 꾸역꾸역 빨았다.

“어이, 수구보수 꼴통! 올해는 아직 조용하더라. 올핸 데모 안 하나?”
대기업 밥을 먹고 있는 친구의 충혈된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얘는 진보야, 진보!”
중소기업 밥을 먹고 있는 친구가 나를 대변해 주었다.

“무슨 소리, 우리나라에서 제일 수구보수 꼴통분자들이 바로 즘마들 집단아이가.” 농담인 줄 알았더니 대기업 밥을 먹고 있는 친구는 조금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취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표정의 학생처럼 더듬거렸다.

“어이, 재벌 똘마니. 나는 한 번도 수구보수 꼴통당에 투표한 적이 없는데요…….”
“야 임마, 느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집단이야. 알아!”
내 가슴에 찬물을 끼얹어 살얼음이 서걱거리게 한, 대기업 밥을 먹는 친구는 현장 노동자로 자동차 만드는 일을 한다. 일찍이 초등학교를 마치자말자 꼴머슴을 살다가 시내 빵공장에서 빵을 만들다가 울산으로 내려가 이 나라 산업역군이 되었다. 동네 어른들의 말을 빌어 자수성가한 친구의 말을 우리는 착한 모범생처럼 듣고만 있었다. 누군가가 끼어 들고 싶어 안달을 했지만 내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야 임마, 느그는 대원군 같은 놈들이야…….”
수출 지상주의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 나는 웃었다. 개방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농민들이 왜 해마다 도시에 나와 난리를 치느냐고? 나는 침묵했고 술자리는 부도난 공장처럼 썰렁해졌다. 그의 말은 이 나라 다수의 집약된 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교회 장로가 모는 봉고차로 우리들의 고향 마을로 돌아갔고 고향에 살아 돌아갈 고향집이 없는 나만 홀로 남아 소주를 홀짝거렸다
농업을 파산시켜 대망의 공업국가가 된 나라. 그러나 반도체를 수출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농산물 수입에 바치는 나라에서 오늘도 지구의 허파를 지키는 농투성이들만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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