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조기관세화, 비겁한 논리

  • 입력 2009.08.17 13:19
  • 기자명 장경호 새사연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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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부가 9∼10월에 쌀의 조기관세화, 즉 쌀시장의 완전개방 여부에 대해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히면서 조기관세화에 동조하는 주장들이 언론 매체를 통해 자주 소개되는 흐름을 볼 때 조기관세화를 밀어붙이려는 여론몰이가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청맹과니’ 조기관세화론 조기관세화를 주장하는 논리를 압축적으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어차피 2015년부터는 쌀시장을 관세화로 완전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때 가서 개방하면 약 40만톤의 의무수입물량(MMA)을 영원히 안고 가야 하지만 내년부터 조기관세화 개방을 하면 약 30만톤의 의무수입물량만 계속 안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관세화시기를 늦출수록 2014년까지 해마다 의무수입물량 부담이 약 2만톤씩 늘어나기 때문에 빠르면 빠를수록 유리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높은 국제 쌀값을 고려할 때 고율의 관세를 물고 수입되는 쌀이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조기관세화가 국내 쌀시장을 보호하는데 오히려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최근 1∼2년 사이에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국제 쌀값이 언제까지 높게 유지될 것인지, 향후 중장기적으로 국제 쌀값이 어느 수준에서 어떻게 변동할 것인지 아무도 쉽게 예측하지 못하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는 조기관세화론의 허약한 논리는 더 이상 반박의 대상도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중장기적으로 쌀의 관세수준을 어떤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먼 조기관세화 논리는 유치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관세화 이후 단 한 번의 쌀수입 폭증에도 국내 쌀농업이 큰 타격을 받아 쌀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할 경우 나중에 그것을 되돌리기 너무 어려운 쌀농사의 비가역성을 우습게 여기는 조기관세화의 논리는 비판하기 조차 거북할 정도이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같은 논리가 조기관세화론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국민들의 이목을 흐리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 다만 우려될 따름이다. 이 보다도 조기관세화론이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어차피 2015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관세화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약 40만톤의 의무수입물량은 영원히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인 사실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1993년 12월 UR농산물협상이 타결되었고, 1995년 1월 1일부터 발효가 되었다. 이에 따라 선진국은 2000년 12월 31일까지 6년간 협정의무를 이행하였고, 개발도상국은 2004년 12월 31일까지 10년간 협정의무를 이행하였다. 세계무역기구(WTO)는 UR협정을 대체할 새로운 협정문을 만들기 위해 도하개발어젠다(DDA)를 발족하였다.

당초 선진국의 UR협정 의무가 끝나는 2000년 12월 31일전에 새로운 협정문을 만들고 2001년 1월 1일부터 적용할 계획이었으나 협상은 타결되지 않았다.

그러자 개발도상국의 UR협정의무가 끝나는 2004년 12월 31일 이전에 DDA협상을 타결하고자 하였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였다. 그리고 DDA는 협상타결 시한을 몇 번이나 넘기면서 아직도 표류하고 있다.

UR협정을 대체할 새로운 협정문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진국은 2000년 12월 31일 시점에서, 개발도상국은 2004년 12월 31일 시점에서 멈추어 있고 추가적인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2004년 12월 31일까지 10년간 UR협정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고, 여기에 더해 2005년부터 쌀시장의 의무수입물량을 2014년까지 4%에서 8%로 확대하는 추가적인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1회의 의무만 이행하였으나 한국은 1번의 의무를 더 추가하여 총 2회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만약 2014년까지 DDA협상이 타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쌀시장을 관세화로 완전개방한다면 한국만 유일하게 3회의 의무를 이행하는 셈이 된다.

애궂은 농민들만 희생양으로

이러한 불평등, 불공정, 불균형 사례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소위 조기관세화론인 것이다.

어차피 이러한 문제제기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미리 꼬리를 내리는 전형적인 겁쟁이의 논리인 것이다. 총성없는 전쟁이라는 통상협상에서 정부관료나 전문가 및 언론이 진정으로 우리나라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부터 제기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도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미리 겁을 먹고 자신들은 안전한 방패막이 뒤에서 애꿎은 농민들만 희생의 나락으로 내모는 비겁한 조기관세화론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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