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궁전의 농사(1)

  • 입력 2009.03.23 08:18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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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날씨 치고는 상당히 더운 오후 세 시쯤, 밭일을 하고 있는데 진주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 바쁘지 않으면 어디론가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한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9년을 한 교실에서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각별한 사이라서 냉큼 따라나섰다.

아직 복숭아나무 전정을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지만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죽마고우와의 소주 한잔이 나에겐 더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차는 북으로 뻗어 있는 청송 쪽 삼십오 번 국도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직 논바닥을 갈아엎지 못한 곳곳에는 트랙터가 부지런을 떨고 매화나무에는 꿀벌들이 닝닝거린다.

“어이 아재, 보현산에나 한번 올라갔다가 오까?”  이 친구는 나와는 먼 일족으로 항렬로 따지자면 손자뻘이 되지만 나는 전혀 관계치 않는데 꼭 아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때로는 그 호칭이 내 운신의 폭을 좁게 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시 한 번 행선지를 묻는 친구를 돌아보다가 나는 그의 머리가 민둥산이 되어버린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고 찌글찌글 웃으며 이죽거렸다.

“요즘 열 받는 일이라도 있나, 뚜껑은 와 열고 다니노?”

“이 양반아, 직장에서나 체면 차리지 되지 여기까지 와서 폼 잡을 필요가 머 있노. 뚜껑 열어놓으니까 마 세상이 다 시원하다. 내가 아재보다는 훨씬 늙어 보이제?”

난장이 똥자루만한 키에 가발을 벗은 친구는 많이 늙어 보인다. 피할 수 없는 유전자가 이 친구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탓이다. 나는 오래 전에 고인이 된 청탁불문으로 술 좋아하고 노래 구성지고 우스갯소리를 잘 하던 친구의 아버지를 그의 얼굴에서 보고 있다. 그리고 보니 우리도 꽤 오래 산 셈이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등이 휘던 아버지들을 그대로 닮아 있다. 매듭 굵은 손마디에 오래 눈이 가고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가 더욱 헐렁해 보인다.

누구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차는 청송 쪽 길을 버리고 횡계 계곡으로 들어선다. 아주 먼 옛날에는 이 계곡 어느 골짜기에 얼음골이 있었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저수지 안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좁은 계곡은 오후만 되면 짙은 그늘이 주는 서늘함으로 여름이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찾아오곤 한다.

우리는 어느 모롱이에 차를 세우고 오줌을 눈 뒤 아찔하게 솟은 비탈을 올려다본다. 이 계곡의 남쪽은 해발 구백 미터가 넘는 기룡산이고 북쪽은 천이백사십 미터인 보현산이다. 보현산 쪽으로 치솟은 비탈을 따라 차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나는 돌아올 때 저 길을 따라 올라가 볼 작정을 한다. 그 길 끝에는 이십 여 호가 되는 마을이 하나 있다. 십 년도 훨씬 더 전에 나는 그 마을에 가서 며칠을 묵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마을을 오래 잊고 살았다.

보현산으로 올라가는 마을 입구에는 승용차들로 빼곡하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봄철이면 미나리를 먹으러 온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기억을 떠올렸고 친구를 돌아보았다. “아 좋지! 보현산 미나리 향기로 세속의 더러운 몸을 좀 씻어볼까?”

집집마다 사람들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우리는 간신히 귀퉁이 한 자리를 얻어 앉아서야 돼지고기나 오리고기를 시켜야만 미나리를 먹을 수 있다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미나리를 중년의 남녀들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탐욕스럽게 먹어대고 있었다.

오리고기 이인 분을 주문하고 돌아보니 무슨 도를 닦듯 미나리에 용맹정진 하는 모습들이 문득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인간의 상술이 보현산 샅까지 차지하고 앉았구나. 그러나 우야겠노, 자 한잔 하자.”

내 의중을 간파한 친구가 허벅지를 툭 치며 술잔을 내민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던 속을 차가운 소주가 짜릿하게 적신다. 오리고기는 소태맛인데 된장을 푹 찍은 싱그러운 미나리 향기가 일품이다. 우리는 허기진 염소처럼 허겁지겁 풀을 뜯으며 서둘러 잔을 비웠다.

오리고기를 절반도 못 먹고 시킨 미나리는 동이 났다. 고기 타는 냄새가 눈썹 밑으로 파고드는 비닐하우스를 빠져나오자 따스한 봄기운이 코끝을 탁 때리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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