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지루했던 봄날의 하루

  • 입력 2009.03.16 08:30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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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가 하얗게 꽃을 터트리고 산수유도 노랗게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날씨는 맑고 곱다. 그야말로 화창한 봄이다. 이 봄날에 나는 어느 한 자리에 진득하게 붙어 있지 못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며칠째 오른손바닥이 오그릴 수 없을 정도로 아파 이틀이면 될 복숭아 전정을 아직 마치지 못하고 있다. 가위질을 너무 한 탓인데 문제는 며칠이나 이 정도로 아프다는 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징조가 분명하다. 병원에라도 가볼까 하고 몇 번이나 생각을 했지만 막상 발걸음은 떨어지지를 않는다.

신문을 펴자 세상은 온통 불협화음이다. 대통령이 장관의 옷차림에 잔소리를 하고, 한 대법관의 촛불시위 재판 간섭으로 아귀다툼을 하고, 비정규직법안으로 시끄럽고, 30조원의 추경예산으로 싸우고, 북한이 발사할 것은 인공위성이 아니라 미사일이라고 쌍심지를 켜느라 총체적 난국이다.

톱 들고 밭에 들어갔다가는 돌아오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나는 애마를 타고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밭을 순례하듯 돌아보러 나간다.

마을 뒤편에 있는 밭 근처에서는 누군가가 포도 전정목과 비닐을 태우느라 짚동 같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친다. 폐비닐 보관하는 자리가 오래 전부터 지정되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늘 저렇게 태워서 없앤다. 나무와 비닐을 함께 태우면 다이옥신이 발생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알아도 그것을 무시한다. 토양과 농촌 환경을 보전하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일이지만 잘 안 된다. 아직도 농약병이 논두렁 밭두렁에서 나뒹굴고 농약봉지와 비닐 조각들이 논밭으로 굴러다닌다.

뒷산 으슥한 곳에는 시내 사람들이 버려두고 간 냉장고며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과 폐자재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냉장고 하나에 돈 몇 천 원이면 시청에서 수거를 해 가는데 그것이 아까워서 농촌에 와서 버리고 간다.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문득 지난 가을 낚시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북천으로 간다. 거기에는 작년 11월 어느 날 던져두고 온 낚시 도구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낚시꾼들의 일반상식으로는 도저히 낚시가 되지 않을 곳이라서 아예 발길이 없는 곳이라 이렇게 손이 타지 않은 것이다.

“벌써 낚시가 되더나?”

애마 뒷자리에 실린 낚싯대를 본 춘식이 형님이 좀 야릇한 시선으로 묻는다. 그 눈빛에는 낚시질이나 하러 다니는 어설픈 농땡이 일꾼쯤으로 여기는 비웃음이 서려 있는 걸 나는 안다. 그는 땅벌레처럼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술은 몇 잔 마셔도 자기 돈으로 사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다. 나는 가끔 그가 존경스러워 보일 때도 있다.

마을 초입의 복숭아밭으로 가니 시내에서 온 낯선 여자 다섯 명이 나무 밑에서 민들레를 캐고 있다. 그들의 손에는 호미가 아니라 작은 쇠스랑이 하나씩 들려져 있다. 우리 밭 민들레는 워낙 뿌리가 굵고 실해서 해마다 이맘때면 사람들이 몰려들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건 장난이 아니다. 캐낸 민들레 뿌리가 2-30센티쯤 것들이 수두룩하다. 그만큼 깊이 땅을 판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민들레를 캐낸 자리의 구덩이는 메우지도 않아 마치 폭격을 받은 전장처럼 엉망이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인간 두더지를 보니 갑자기 화가 솟구친다.

나는 본래 경운을 하지 않는 터라 그들이 민들레를 캐는 것이 오히려 땅에도 좋을 것 같아 매년 그냥 두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지매들 보소. 이렇게 나무뿌리를 망쳐 놓고 농사 책임질라 카능기요?”

다소 과장된 밭주인의 거친 목소리에 놀란 여자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구덩이를 메우고는 서둘러 밭에서 빠져나간다. 나는 어느 순간 너무 좀 심했나 싶어서 머쓱해져 하늘을 본다. 해는 아직도 서산까지 가려면 짱짱하게 멀다. 채 다 못 메운 구덩이를 발로 메우고 밭에서 나오니 대로변인 밭가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흩어져 있다.

담배 갑, 휴지, 음료수 병과 캔, 기름 묻은 장갑들은 차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버린 것들이다. 전정을 하고 나뭇가지를 치우던 날 한번 주웠었는데 또 이렇게 던져 놓았다. 나는 그 잡동사니들을 치우면서 경을 외듯 연신 군소리를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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