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

  • 입력 2009.03.16 08:29
  • 기자명 이재현 전북 완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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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난 봄이 좋다! 타고 나기를 춥고 어둡고 캄캄한 걸 싫어해서, 겨우 내내 그저 따스한 봄볕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오늘 그 봄볕이 마루에 한 바탕 들어왔다. 청소하려고 빗자루를 들었던 나는 그만 빗자루를 잡은 채 마루 가운데에 앉아 온몸을 햇볕에 맡겼다. 등허리에, 손등에 와 닿는 햇살이 간질간질하다.

손을 쥐었다 놨다도 하고, 열 손가락을 다 펴서 왔다갔다도 하고, 멈춰서 손가락 사이로 가만히 들어오는 곰실곰실한 햇볕을 느끼기도 한다. 마음도 몸도 다 편안하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문득 노랫말이 생각났다. 내친 김에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조용조용 불러봤다. “푸른 하늘 푸른 꿈이 맞붙는 곳으로 가르마 같은 철길 따라......” 참 고운 곡이다. 그리고 참 슬픈 노래다. 빼앗긴 봄, 그 때는 나라와 부모형제와 강산까지 다 빼앗겼으니 지금보다 더 절절했겠지. 아니, 지금 우리도 들을 뺏기고 봄조차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퍼렁퍼렁퍼러엉!”

갑자기 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얼른 손을 바삐 움직였다. 마루를 쓰는 둥 마는 둥 빗자루를 놓고 세탁기 뚜껑을 열어 빨래를 꺼내기 시작했다. 괜히 허둥대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아직도 감성이 새록새록 한 것이 놀랍기도 해서 혼자 피식 웃다보니 오늘 할 일이 태산이다.

“부부부부붕붕!”

시동이 제대로 걸린 트랙터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리고, 보나마나 뒷집 아저씨나 총각이 또 밭가는 모양이다. 고추 들어갈 자리 벌써 두 번 째 로타리치는 것 같다. 고추 심으려면 아직 달포는 더 있어야 되는데 부지런한 농사꾼은 얼음기 빠져 후물거리는 밭고랑이 답답해서 그냥 못 놔두나 보다. “아이고 우리 집 일은 해도해도 못 잡고 가는데, 으쩌 저 집은 일을 땡겨서 하끄나.”

마당 가운데로 빨랫대를 옮겨 놓고 하우스에 들렀다. 열흘 전에 심은 감자는 아직도 기미가 없다. 고랑을 쭉 훑으며 안쪽까지 들어가도 감자싹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하나씩, 싹이 아니라 노란 몸뚱아리를 내놓고 있는 감자씨들이 눈에 띄어 흙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하우스를 나왔다.

그리곤 습관대로 차 들어오는 골목길을 쳐다본다. 영농발대식 준비로 ‘잠깐만’ 갔다온다던 서방은 한 참 됐는 데도 소식이 없다. 감자 멀칭하자더니 오늘도 틀렸는가 싶은 차에, 우리집 트럭이 들어온다. 하도 고물이라서 어디에 내놔도 금방 눈에 띄는, 그래도 저거 없으면 농사도 볼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집 우선순위 1호 포터 오신다.

서방은 오자마자 오늘 멀칭 끝내야 된다고 몰아대며 현관문으로 들어간다. 대충 밥 한술 뜨고는 비닐 둘러메고 아랫방의 둘째까지 불러내 성큼성큼 하우스로 앞서간다.

셋이서 그렇게 몇 시간, 벌써 해가 떨어지려나 보다. 우리 하우스 지나 논밭 있는 어르신들이 집으로 가시다 말고 먼 발 치서 아는 척을 하신다. 봄 되니 나만 좋은 게 아닌가 보다. 여기 아파 저기 아파 하시면서도 따뜻해지니 호미 들고 날마다 밭구경 가신다. 우리는 또다시 일손을 재촉해 허리가 아프고 입에 단내가 날 때쯤 돼서야 작업이 끝났다.

전화기가 울려 열어보니, 군대 간 큰 아들이 아닌가! “어구 그려 울아덜!” 지낼만 하냐, 안 춥냐, 밥은 먹을만 하냐 등등 묻다가 제 아빠도 바꿔주고 제 동생도 통화했다. 자대배치 받고 전화하는 거라고, 잘 지낸다고, 밥도 좋고 자유시간도 있고 괜찮다고, 식구들도 잘 지내란다. 보고 싶단다.

눈물이 핑 돌만큼 반가웠다. 멀칭 마무리에 셋 다 기진맥진했었는데 정말 신나는 선물이었다. 제 아빠 말대로 대한민국 군대 참 좋아졌나 보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뒤죽박죽된 창고가 눈에 들어온다. 둘 다 바쁘단 핑계로 저렇게 내방쳐 둔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내일이라도 치워야 되는데... 아마 내일 서방은 저쪽 하우스 로타리 칠 것이고, 모레는 도연맹 교육한다고 나갈 것이고, 나 역시 딴 볼일로 나가야 한다...

아무튼, 연장정리야 농사철이니 언제고 될 테고, 올 해는 더 얼마나 힘들어질지, 얼마나 더 아스팔트로 나서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한 봄날은 오는 것이고, 봄은 가을을 믿고 무엇이든 심는 철이고, 땅과 하늘과 계절은 한결같이 씨앗을 뿌리는 농민이 갸륵하여 꼭 도와주시리라 믿고 또 믿는다.

이재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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