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호는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질렀다

  • 입력 2024.03.24 18:00
  • 수정 2024.03.24 20:54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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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호가 상두재를 넘어 종정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세상은 어둑신하였다. 송진사의 집 앞을 지나 희옥이가 일러준 집으로 가자 그녀는 대문 밖에 나와 있었다.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었는데 장옷을 걸치지 않아 용모가 시원하였고 쪽진 머리에 비녀를 찔러 금산사 때보다 숙성해 보였다. 상대를 알아본 그들은 반절을 하고 들길로 내려와 하나는 앞서고 하나는 처져 걸었다. 원평천 둑길에 올라서자 마차바퀴가 미치지 않는 길 가운데 풀숲에서 이슬이 채였다.

“낭자라고 부르겠습니다. 괜찮겠지요?”

병호가 동의를 구하자 그녀가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리 하시지요. 제 이름은 숙영입니다.”

남정네 곁에 붙는 모습도 놀라웠지만 먼저 이름을 밝히는 데서도 배포가 보였다.

“제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아재에게 들었지요. 선비님이라 부를까요?”

“선비라기엔…… 없어서…….”

“그럼 아재의 동무이니 동무님이라 하겠습니다.”

수류면 읍내를 통과할 무렵 그녀는 처음처럼 처져오더니 민가가 사라지자 다시 붙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치마저고리 쓸리는 소리와 숨소리가 들려오는데 병호는 평소보다 걷는 일이 힘겨워졌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그가 세상에서 아는 여자라곤 할머니가 전부였다. 살면서 할머니 외에는 만나본 일도 없거니와 여인네와 단둘의 길벗이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금구 현성을 나와 약작골을 넘으며 보니 기슭에 진달래가 촘촘하고 위에는 산벚꽃이 요란하였다. 그 산자락에서 바람이 불자 꽃내음인지 분내인지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바깥출입이 드물어 약동하는 모든 것이 신기한 희옥이의 조카는 진달래며 동의나물을 해찰하느라 걸음이 더디어졌다. 물론 줄지 않는 길이 꽃구경 탓만은 아니었는데 아무리 키가 커도 노상의 일이 바느질보다 수월할 리 없었다. 숯고개를 앞두고 마을을 지나칠 적에 그녀가 누구네 싸리울 너머 붉은 송이를 가리켰다.

“저 꽃을 아시는지요?”

“나무 이름이 박태기니 박태기꽃이겠지요. 꽃 모양이 밥테기 붙은 것 같아서 밥테기나무라고도 합니다. 관상용이지만 여인네들 약재로도 쓰입니다.”

그녀가 스스럼없이 남정네 얼굴을 보았다.

“대답을 못할 줄 알았습니다. 누가 박태기나무를 알겠습니까?”

“알래서가 아니라 아버님이 약재를 다룹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길가의 풀과 꽃만 만나면 이름을 물었다. 그러다 갓길에 무리지은 보랏빛 꽃과 눈이 마주쳤다.

“저 꽃은 색이 곱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름이 좀 망칙합니다.”

“더 궁금합니다.”

“큰개불알 꽃입니다.”

마을 하나를 지나면서 병호는 탱자울 앞에서 가시 몇 개를 갈무리하였다. 호기심 많은 그녀가 어디에 소용되는 물건인지 그것은 또 묻지 않았다. 숯고개는 제법 긴 편으로 그곳을 지나면 효자마을이 나타나고 그 마을을 지나야 전주에 닿게 돼 있었다. 길옆 잔디에 물이 오르고 나뭇가지에 움트는 잎이 투명해지는데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분주히 나무를 팼다. 오솔길 옆 밭에는 파 마늘이 자라고 산자락의 다락논에선 황소를 부려 쟁기질하는 농부의 목청이 굵었다. 검은등뻐꾸기가 홀딱벗고 홀딱벗고 하면서 맑게 울면 반대편 뻐꾸기가 아련한 소식을 건네므로 살아있는 것들 자라는 소리가 수런수런 들리는 듯하였다. 밀밭을 질러 고개 정상에 이르자 소나무 두 그루와 사람들이 쉬면서 반질반질해진 바윗돌이 보였다. 다리쉼을 하고 내려와 새내를 건너면서 보니 잡아 올린 치맛자락 밑으로 금산사에서 본 당혜가 징검돌을 더듬었다. 징검돌과 징검돌 사이 번 곳이 있어 병호는 훌쩍 뛴 다음 몸을 돌이켰다. 역시나 망설이는 기색이라 손을 내밀자 선뜻 잡고 건너오는데 허공에 뜬 몸이 휘청거려 힘을 주고 버텼다.

“하마터면 빠질 뻔하였습니다.”

그녀가 징검돌을 건넌 뒤 말하였고 병호도 아슬아슬했던 참이라,

“볼만하였겠습니다.”

그리 말하였다. 살면서 여인과 어딘가를 동반하는 것도 처음이요, 손까지 잡았으니 더욱 믿기지 않아 병호는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질렀다. 용머리고개에 오르자 전주천이 드러나며 감영의 번다한 건물이 펼쳐졌다.

“남문밖시장에서 요기를 하시지요. 가리는 음식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그걸 어떻게 주워섬길까요. 동무님 드시는 걸 먹겠습니다.”

간밤의 흥성거림 대신 강아지 새끼만 어슬렁대는 색주가를 지나자 책방거리가 나타나고 소금전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서문밖시장이 남문밖시장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장시라 흥정하는 사람과 악다구니 쓰는 상인들 목소리에 고막이 팔랑거렸다. 사람들에 치여 놓치기라도 할까봐 병호는 그녀에게 바싹 붙어 섰다.

희옥이네 아버지 상을 당하여 기범이네와 몰려간 국밥집이 인근 어디인 듯하였으나 쉬 어림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골목을 마냥 뺑뺑이 돌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무데고 천막을 이어붙인 국밥집을 찾아들었다. 천막 아래 끼니 때울 목로가 있고 마루에도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벽을 맞창 낸 집 안쪽은 돗자리를 깔았으며 손님들로 후끈한데 도야지 비린내에 술찌끼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안의 빈자리에 좌정하며 국밥을 주문한 병호는 괴나리봇짐을 당겨 기범이에게 빌린 낙죽장도를 단번에 뽑도록 단속하였다. 잠시 후 내장에 시래기 얹은 국밥이 나와 다대기를 풀고 한 술을 떠 넣었으나 냄새 때문인지 여인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이 난리여?”

국밥을 반쯤 비웠을 때 예닐곱 사내가 방에 들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빈자리가 하나뿐인 것을 보고 맨상투 사내가 밥 먹던 손님 엉덩이를 툭툭 걷어찼다.

“다 먹었거든 나가잖고 왜 뭉개고 지랄여!”

그 서슬에 한 상에서 먹던 사내 셋이 숟가락을 놓고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까지 슬금슬금 자리를 물렸다. 전주 남문밖시장은 조선의 쌀값을 결정하는 곳인 만큼 먹잘 게 많고 패악질을 일삼는 무리도 많다는 소문인데 그 부류인 듯하였다. 소악패들은 색주가에 기생하며 상인에게 구전을 뜯고 작물을 거래하여 이문을 남기면서 돈을 받고 청부를 일삼았다. 또한 이권을 놓고 낫과 칼을 들고 싸우는가 하면 아녀를 납치해 색주가에 넘기고 관속과 결탁해 감영의 물건 빼돌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막무가내로 손님을 내치자 주인인 듯한 여인이 술과 머릿고기를 내와 맘껏 잡숫고 소란만 일으키지 말라고 손을 비볐다. 결국 손님을 내몬 파락호 무리가 가운데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조용히 앉아 국밥을 먹는 남녀가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병호가 국밥을 먹으며 살펴보니 처음에는 탁주잔을 돌리며 저희끼리 신소리를 주고받더니 무명으로 이마를 동인 자가 두 사람을 턱짓하였다.

“엊그제 서천다리 색주가에 새로 온 년이 있다기에 품어주었지 뭔가. 헌데 체수며 생김새가 똑같네그려.”

그러자 갈고리에 패인 팔뚝을 흔들며 다른 사내가 거들었다.

“내가 그년을 나흘 전에 품었으니 형님일세.”

“그깟 헌 구멍에 먼저 든다고 형님일까? 그럴 값이면 늬 삼촌도 동생이지.”

흥이 난 듯 악소배들은 과장스럽게 웃었다. 병호가 고개를 드는데 숙영은 처음보다 열심히 국밥을 먹는 중이었다.

“헌데 그년 감창소리가 어찌나 색을 돋우는지 말여, 밤새 타고 노는 데도 좆대강이 숙지를 않더라니.”

“흑안다즙이라잖나. 감창소린들 오죽할까.”

“저 보게. 얼굴이 가무스레하니 영락없는 그 계집일세. 누구 오입쟁이와 눈 맞아 도망치는 길인지 알아봐야겠는 걸.”

“그걸 어찌 알겠는가? 불을 켜지 않았을 터에 얼굴로 안단 말인가?”

“얼굴로 아는가. 슬그머니 들어가 보면 알지.”

음흉한 웃음이 터질 무렵 병호는 칼을 빼 무릎 아래에 놓았다.

“그럼 확인은 형이 하실라나 동생이 하실라나.”

“게야 형인 내가 나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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