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한국 유기농업의 시작

  • 입력 2024.03.24 18:00
  • 수정 2024.03.24 20:48
  • 기자명 원혜덕(경기 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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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덕(경기 포천)
원혜덕(경기 포천)

지금부터 49년 전인 1975년 9월, 일본인 손님 한 사람이 우리 집에 왔다.

일본의 유기농업 단체인 ‘애농회’를 만든 고다니 준이치 선생이었다. 그 2년 전에 나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고다니 선생을 찾아갔다. 그분이 내는 잡지를 감명 깊게 읽고 계셨기에 한 번 만나고 싶으셨다고 했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다니 선생은 “이제까지 많은 한국 지인들이 초청했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당신을 만나서 이야기하니까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당신이 초청해 주면 열매 있는 한국 방문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농부인 그분은 벼가 익을 무렵인 가을에 한국에 와서 농촌도 돌아보고 싶다고 했다. 이듬해 9월에 아버지는 김포공항에 나가서 고다니 선생을 모셔왔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고다니 선생은 아버지의 안내로 홍성·임실·제천·강릉 등을 둘러보며 지인들도 만나고 농촌도 돌아보고 엿새 만에 돌아왔다.

6.25 전쟁 후에 서울에서 부천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풀무원 공동체를 세우고 꾸려가던 아버지는 지인 40여 명을 불러서 고다니 선생의 강의를 같이 듣자고 했다. 개인이 많은 사람이 모여서 강연을 듣고 먹고 잘 장소를 갖고 있기가 쉽지 않은 어려운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비어있는 소집을 개조하여 시멘트 바닥에 마루를 깔아 강연장을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그곳에서 강의도 듣고 밥도 먹고 잠도 잤다. 그때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나도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도와 밥을 해서 강의실로 날랐다.

고다니 선생님은 4일간 새벽부터 쉬지 않고 강연을 하셨다. 첫날 시작하기 전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고통을 준 것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면서 깊이 머리를 숙이셨다. 그리고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는 일본의 농사를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10년만 있으면 한국도 틀림없이 일본과 같이 농약과 공해의 피해가 나타날 텐데 그러기 전에 하루빨리 유기농업으로 돌아서라고 했다. 농약과 제초제가 주는 피해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었다. 참석한 분들은 그런 말을 처음 들었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분들은 농한기에 고다니 선생님을 다시 한번 초청해 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했다. 그 이듬해인 1976년 1월에 아버지는 다시 고다니 선생을 초청했다. 그때는 겨울이라 추워서 전해 가을에 썼던 맨 마루에서 강연을 듣거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양계장 하나를 강연장으로 개조하셨다. 난방은 연탄난로를 여러 개 놓는 것으로 해결했다. 4일간의 강연이 끝나는 마지막 날 밤에,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제부터 농약과 제초제,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일본 애농회처럼 모임을 만들어 서로 힘을 얻자고 했다. 아버지가 바른 농사를 짓는 모임이라는 뜻의 ‘정농회(正農會)’를 제안했고 다들 좋다고 동의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유기농업 단체인 정농회가 탄생했다. 그때 남편은 스물일곱 살의 가장 젊은 창립회원이었는데 농사를 자기의 평생 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때가 나와 사귐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즈음 부천은 도시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오지였던 양주 땅 4만평을 구입하여 후에 사위가 된 나의 남편과 함께 농장을 옮겼다. 남편은 트럭으로 이삿짐도 옮기고 척박한 땅을 일구려 거름도 수없이 퍼 날랐다. 풀무원 농장에서 본격적으로 유기농업을 시작하자 많은 젊은 사람들이 바른 농업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들은 몇 년간 농장에서 함께 살면서 유기농업을 배웠고 그런 후에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각 지역의 유기농 1세대가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나는 결혼 후 남편과 같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헤아려보니 농부가 된 지 40년이 다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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