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배고픈 날이면 산으로 갔다⑥ 물 한 모금의 행복

  • 입력 2024.03.24 18:00
  • 수정 2024.03.24 20:4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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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부산스레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고만고만한 나이의 사내아이들이라고 해도, 무시로 산에 들어가서 휘젓고 다녔던 건 아니었다. 가령 6교시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국민학교 고학년의 경우, 수업이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해가 서산 능선에서 몇 뼘밖에 남지 않은 시각이므로, 산행은 주로 반공일인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이루어졌다. 어린아이라도 세 끼 밥값은 해야 했다.

-망태 메고 산에 가서 솔방울 좀 주워 오너라.

-뒷산에 가서 토끼 먹일 꼴이나 한 망태 베어 오너라.

-외양간에 매둔 소 끌고 나가서 배가 불룩하게 좀 먹이고 오너라.

그런 경우 기쁜 마음으로 룰루랄라 집을 나서는 아이는 드물었다. 입술을 한 발이나 내민 채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려 보이고는, 소고삐 끝을 뱅뱅 돌리며 사립을 나선다. 가다 보면 마을 어귀에서 같은 처지의 동무들을 만나게 되는데…언제 그랬냔 듯 얼굴이 밝아진다.

들길을 빠져나가기 전엔 소의 고삐를 놓아서는 안 된다. 녀석이 둔한 것 같아도 눈치가 빤해서, 꼬마 주인이 한눈을 판 새에 번개같이 혀를 내둘러서는, 길가 보리밭에서 청보리 한 움큼을 냉큼 낚아채서 입에 욱여넣기 일쑤다. 밭 주인한테 들키면 혼쭐이 날 일이다.

드디어 산속에 들었다. 각자의 소를 풀숲에 풀어놓고는 먹을거리를 찾아 나선다.

-저기 덤불에 다래하고 머루가 열리긴 했는데…아직 안 익었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저기 저거 더덕 넝쿨 아냐?

-맞다, 더덕. 어, 여기도 있다. 캐자!

“우거진 덤불 아래쪽을 잘 살펴보면 거기 더덕 넝쿨이 있어요. 얼핏 봐서는 눈에 잘 안 띄는데, 근처에 가면 냄새가 나거든요. 더덕 향기가 확 풍긴다고요. 어른들 더덕 캘 때 따라다녀 본 애들은 냄새만 맡고도 알아요. 아이들은 일부러 더덕을 캐러 다니지는 않아도 일단 발견했다 하면 작업에 들어가지요. 더덕은 칡처럼 깊게 팔 필요 없어요. 손으로 헤집거나 뾰족한 돌이나 막대기로 약간 판 다음에 손으로 당기면 뽑혀요.”

강원도 출신 이청길씨의 얘기다. 더덕 한 뿌리씩을 캐든 아이들은 제 가끔의 방식으로 껍질을 벗긴다. 낫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손톱으로 낑낑대며 돌려 벗기기도 하고, 뿌리가 굵고 억센 놈은 돌로 잘근잘근 두드린 다음에 벗기면 어렵지 않게 허연 속살이 드러난다. 흙이 좀 묻었어도 옷깃에 대충 문지르고 나서 입으로 가져간다. 한 입 베어 물면 쌉싸름한 것이, 딸기나 다래 같은 열매들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칡도 캐 먹고 더덕도 캐 먹고 이런저런 열매도 따 먹고 하다 보면 갈증이 난다.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물을 마실 수 있는지 ‘물 나는 곳’을 다 안다. 이청길씨의 얘기다.

“어느 산이든 곳곳에 조그만 물웅덩이 같은 게 있거든요. 어른들은 나무하다가 목이 마르면 그 물을 손으로 떠 올려서 마시지만, 우리 같은 애들은 넙죽 엎드려서 고개를 처박고 입을 대고 마셔요. 더러 준비성이 있는 녀석은 들판을 지나오면서 미리 보릿대나 밀대를 잘라서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고놈을 꺼내서 빨대 삼아 빨아 마시기도 했어요.”

물웅덩이가 있다면야 그렇게 마시면 되지만, 갈증이 나서 허겁지겁 동굴처럼 움푹한 곳으로 찾아 들어갔는데, 바위의 표면을 타고 키 높이에서 물이 흐르고 있다. 명색이 만물의 영장인지라, 짐승처럼 혀로 그걸 핥아먹을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다 방법이 있다. 아이 하나가 억새 풀잎 하나를 잘라 갖고 와서는 바위 위쪽에 대고 돌멩이로 끝을 눌러 놓자, 물줄기가 억새 풀잎을 타고 내려와 졸졸 흐른다. 입을 헤벌리고서 받아먹는다. 극도로 목이 말랐을 때 정신없이 들이켠 찬물 몇 모금은…세상 어느 진수성찬과도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웅덩이 물을 실컷 들이켜고 상체를 일으켰을 때, 꼭 이런 소리를 하는 아이가 있다.

-야야, 너 그 웅덩이에 구렁이 산다는 말 못 들었어? 그 물 마시면 뱀 알이 뱃속에 들어가서, 나중에 똥구멍으로 뱀이 기어 나온대. 너 큰일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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