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배고픈 날이면 산으로 갔다⑤ 칡뿌리 한 토막이면 한나절이 달콤했다

  • 입력 2024.03.17 18:00
  • 수정 2024.03.17 18:5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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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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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야 묵을 것 천진디, 누가 봄철에 산에 가서 참꽃 그런 것을 따묵간디. 그 시절에야 하도 묵을 것이 없었응께 헛짓거리 삼아서 고것이래도 따묵었는디, 그래봤자 배만 더 고파.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어. 참꽃밭에 가면 배고파 죽고 칡밭에 가면 배 터져 죽는다고….”

전남 강진을 고향으로 둔 1947년생 장귀례 할머니의 얘기다. 참꽃밭에 가면 배고파 죽는다는 말은, 진달래꽃 그거 따먹어 봐야 허기를 면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일 터이다. 하지만 칡은 배고픔을 조금쯤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먹을거리였다.

칡은 새로 잎이 돋아나서 덩굴을 뻗기 전에 캐야 영양분이 뿌리에 몰려 있어서 먹을 만했다. 그 시기가 딱 보릿고개와 겹쳤다. 남자 어른들은 겨우내 얼었던 땅이 해빙되기를 기다렸다가, 바지게에 연장을 챙겨지고서 산에 들어가 칡을 캤다. 캐온 칡은 가루를 낸 다음에, 그걸로 국수를 만드는 등 식구들의 양식으로 삼았다. 보릿고개를 이겨낼 대표적인 구황식물(救荒植物)이었던 셈이다. 아이들도 칡을 캤다.

-여기 쯤에 칡넝쿨이 있을 것 같은데…야, 여깄다!

-어디? 바보야, 그게 칡넝쿨이냐 머루 나무 덩굴이지. 여기 있는 이게 진짜 칡이잖아!

-어, 맞네. 잠깐만. 어디로 뻗었는지 주욱 잡고 따라가 보자.

산에 자주 가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숲속에서 마른 칡넝쿨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지만, 마을 뒷산을 안마당 삼아서 휩쓸고 다니는 산골 아이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드디어 두 녀석이 망태를 내려놓고는 괭이를 꺼내 뿌리 쪽을 파기 시작한다. 한참을 파 내려가서 제법 도톰한 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형뻘 되는 남자애가 지나다가 그들이 파고 있는 흙구덩이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얘들아, 헛고생하지 말고 딴 데 가서 다시 찾아봐라. 이런 진흙땅에 있는 건 수칡이라서 캐봤자 뻣뻣하고 맛도 없어. 저쪽 참나무 밑에 가서, 검은 땅에 뻗어 있는 넝쿨을 찾아봐라.

“칡을 캐서 찢어보면 그 속살에 마치 좁쌀 알갱이가 뭉쳐있는 것처럼 생긴 게 있는데, 그게 암칡이에요. 입에 넣고 씹으면 단물과 함께 가루가 나와서 먹을 만해요. 그런데 수칡은 꼭 나무토막을 씹는 것처럼 억세요. 단물도 별로 안 나오고. 수칡은 주로 진흙땅에 뿌리를 내리고, 암칡은 부엽토 같은 데서 자라거든요.”

소싯적에 칡깨나 캐 먹었다는, 강원도 출신 이청길씨의 경험담이다.

심마니들이 산삼의 줄기만 보고도 몇 년근이라는 걸 척 알아맞히는 것처럼, 산골 마을에서 잔뼈가 굵은 남자들은 넝쿨만 보고도 칡의 굵기나 질감을 훤히 뀄다. 이씨가 말하는 수칡을 다르게는 나무 칡, 암칡을 가루 칡이라고도 불렀다. 구덩이를 어지간히 파 내려가다가 사내아이 두엇이 부여잡고서 힘껏 당겨 올리면 나무 칡은 뻣뻣해서 요지부동이지만, 가루 칡은 뿌리 아래쪽이 툭 부러진다. 암칡, 즉 가루 칡이 그만큼 부드럽다는 얘기다.

칡을 캐들어가다 보면 단단한 바위틈으로 뿌리를 내려서 도저히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칡뿌리가 수직으로 뻗지 않고 땅 표면으로 뻗어 있어서 잡아당기면 금방 일어나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칡은 단단해서 먹을 수가 없다. 같은 칡뿌리라 해도 부위별로 씹히는 맛이 영 다르다.

-자, 우리 셋이 힘을 합쳐서 캤으니까 낫으로 세 토막을 낸 다음에, 가위바위보 하자!

사내아이 셋이 가위바위보를 한다. 1등은 상대적으로 가장 부드러운 맨 아래쪽 토막, 2등은 가운데, 그리고 꼴찌는 가장 뻣센 맨 윗부분을 차지한다.이제 칡 토막을 찢어서 입에 넣고 씹으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그거 한 토막이면 한나절 내내 입에 달고 다닐 수 있었다. 여자애들의 경우, 어쩌다 마음씨 넉넉한 사내아이를 만나면 반 토막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사내 녀석들이 맛없다고 잘라서 내버린 잔뿌리라도 주워서 씹을 수밖에 없었다. 칡밭에 가면 배 터져 죽는다는 말은, 기운이 달린 여자애들에겐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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