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농지개혁’ 그 후 … 농민 살림살이는 나아졌을까?

  • 입력 2024.03.10 12:35
  • 수정 2024.03.11 07:37
  • 기자명 강선일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

“1950년의 농지개혁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결정적 장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중략) 만약 이게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지금과 많이 다른 나라가 됐을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감독 김덕영) 초반에 인용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이다. 지난해 7월 15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한 한 위원장(당시 법무부 장관)은 위와 같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고평가하며,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이 ‘만석꾼(대지주)의 나라’에서 ‘이병철(전 삼성그룹 회장)·최종현(전 SK그룹 회장) 회장 같은 영웅들이 혁신을 실현하고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나라가 됐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김덕영 감독은 영화에서 한 위원장 및 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승만의 1949~1950년 농지개혁이 대한민국 근대화의 발판이 됐다고 강조했다. 영화엔 농지개혁으로 토지를 얻은 농민들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 ‘자유대한’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참전했다는 해석과 함께, 영화 막바지 농지개혁으로 “한국에서 소작농이 사라졌다”는 단언도 담겼다.

지난달 27일 관람객 10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 중인 <건국전쟁>이 촉발시킨 ‘이승만 재평가’ 기류 속에서, 적지 않은 언론과 인사들은 ‘이승만 농지개혁’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승만 농지개혁’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승만은 정말로 농지개혁의 주역이라 할 수 있을까? 농지개혁 이후 한반도 남측 농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조봉암과 국회 소장파 주도 농지개혁안 통과 막았던 이승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1949~1950년의 농지개혁을 거치며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지주계급이 소멸한 것도, ‘결과적으로’ 농지개혁 후 한국 사회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갈 토대가 마련된 것도 부인할 순 없다. 그러나 <건국전쟁>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이승만이 이 모든 과정의 주인공이었다기엔 무리가 따른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때로는 미온적이었고, 때로는 훼방에 가까운 행동을 하기도 했다.

남북 분단 다음 해인 1946년, 한반도 북측에선 ‘무상몰수·무상분배’, 즉 지주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눠 주는 급진적 토지개혁 정책이 실시됐다. 남측에서도 더는 토지개혁을 미뤄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입각한 죽산 조봉암은 현장을 돌며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끝에, 1948년 11월 농림부 명의의 ‘토지개혁법’ 시안을 만들었다.

농림부는 ‘유상매입·유상분배’, 즉 지주에게 땅을 구매해 농민에게 판매하는 농지개혁 방식을 취했다. 농민은 6년간 20%씩 지가의 총 120%를 부담하고, 지주에겐 3년 거치 후 150%를 보상한다는 게 토지개혁법안의 골자였다. 농림부는 법안을 1949년 1월 24일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정작 이승만은 농림부 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농림부 안은 국무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채 기획처로 보내졌다. 기획처는 지주보상액과 농민상환액을 똑같이 200%로 하고 농민이 상환액을 10년 연부로 내게 하는, 농민 입장에선 농림부 안보다 불리한 안을 만들었다.

이 와중에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 관사 수리비를 농림부 예산으로 썼다는,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 등 지주 기반 정당들의 모함(수리비 유용 혐의는 이후 무죄 판결)에 시달렸다. 이승만은 그런 조봉암을 지키긴커녕 장관 사퇴를 권고했고, 끝내 조봉암은 1949년 2월 장관직을 사퇴했다. 이승만은 그 전부터 양곡 매입 문제와 관련해 조봉암을 따돌리다시피 하던 상황이었다.

이후 기획처 안을 놓고 국회 논의가 진행됐고, ‘토지개혁법안’은 ‘농지개혁법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당시 제헌국회엔 ‘소장파’, 즉 독립운동가 또는 사회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의 세력이 강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국회에서 ‘농민상환액 125%, 지주보상액 150%’ 안을 마련해 정부로 보냈다. 이승만은 국회발 농지개혁법안에 불만을 품고 되돌려 보내려다가 “국회가 폐회 중이라 (법안이) 소멸했다”고 일방 통보했다. 소장파가 주도하던 당시 국회는 1949년 6월, 이승만의 뜻과 달리 법안을 원안 가결했다.

미루고 미루다 통과된 ‘누더기’ 농지개혁법

이승만은 농지개혁법의 실시를 어떻게든 미루려 했다. ‘거부권 아닌 거부권’ 행사였다. 그러다가 1949년 5월 벌어진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외국군대 철수, 남북통일협상 등을 주장한 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을 간첩으로 몰며 구속한 공안사건)’으로 국회 활동이 위축된 틈을 타, 이승만정부는 1950년 1월 ‘농민상환액·지주보상액 공히 150%’로 내용을 수정한 농지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조봉암 주도 농림부 안 및 국회 소장파 안 대비 농민 부담 수준이 높은 법안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 뒤늦게 통과시킨 셈이다.

농지개혁법은 여러 예외조항을 둠으로써 지주층이 농지개혁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매수 대상에서 제외된 토지 중엔 사학재단(친일반민족행위자 가문 소유 재단 포함) 및 문중 소유 토지, ‘3정보 이내 자영농지(이를 이용해 일부 지주는 여전히 머슴을 두고 농업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임야 등이 있었다. 심지어 바닷가 논을 염전으로 바꾸는 식의 편법으로 농지개혁 대상에서 벗어나는 사례도 있었다. 이승만은 구조적 농민 착취를 막기 위한 사적 농업노동시장·신용시장·상품시장 등의 개혁도 손대지 않았다.

농지개혁 후에도 농민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건국전쟁>에서 농지개혁의 성과를 찬양한 것과 달리, 정작 농지개혁 후에도 농민의 삶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농지개혁법 제정 직후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시 인플레이션에 따른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이승만정부는 농민들에게 고율의 ‘임시토지수득세’를 현물로 부과했다. 가뜩이나 농지 구매금액 상환 및 수세 납부 등으로 부담이 컸던 농민들은 졸지에 임시토지수득세를 통해 전비(戰費)까지 부담해야 했다. 당시 농민 외엔 세금을 거둘 곳이 없었다고 반론할 수도 있으나, 임시토지수득세는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쫓겨나던 해인 1960년에야 폐지됐다.

농민의 삶을 힘들게 한 요소는 또 있었다. 미국이 공법 480호(PL480)에 따라 한국에 ‘대량원조’한 잉여농산물은 국내 농산물 가격을 폭락시켰고, 여기에 이승만정부의 인위적 저곡가 정책까지 보태졌다. 농민들은 농지개혁의 혜택을 누렸다기엔, 낮은 농산물 가격 및 고율의 세금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다.

<건국전쟁>에선 한국에서 소작제가 사라졌다고 단언했지만, 농지개혁 20년 후인 1970년 ‘농업 센서스’ 보고에 따르면 전 농가의 34%가 다시 소작농으로 돌아갔다. 사실상의 소작농들은 2024년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참고자료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역사비평사, 2007)

서중석,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오월의봄, 2015)

윤충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 형성사>(선인, 2005)

백기완,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1>(한길사, 2004)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