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2월의 농사 일지

  • 입력 2024.03.10 18:00
  • 수정 2024.03.10 18:29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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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아침에 눈을 뜨면 비닐하우스에서 키우고 있는 브로콜리 모종을 살피러 트럭을 몰고 나선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올 때는 모종에 무름병이라도 생길까 눈여겨보고 햇볕이 나오면 비닐하우스 내부 온도가 금세 30도를 웃돌기 때문에 개폐기를 열어 온도를 낮춰줘야 한다. 1월 15일에 파종을 한 후 발아가 시작될 즈음에 한파가 왔다. 이제 막 껍질을 열고 있을 여린 싹이 혹시 얼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영하 10도의 한파를 이기고 상토를 뒤집은 채 빼꼼하게 싹을 내미는 모습은 새삼 경이로웠다. 무엇보다 고마웠다.

엄지손톱 만 한 공간에 2~3개씩 나와 있는 떡잎은 한 개만 남기고 뽑아서 빈칸에 심어주기를 일주일 정도 했다. 마침 비가 오고 흐린 날이 이어져서 어린 모종을 심어놔도 시들지 않고 5일이 지나자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그 후로도 계속 비가 오고 흐린 날이 많으니 모종이 웃자라기 시작했다. 2~3일에 걸쳐 칼슘과 살균제를 가볍게 뿌려 성장을 억제했다. 웃자라지 않게 하려고 상토가 마른 부분만 조심스럽게 물을 주는데 물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곳까지 들어가곤 했다. 저녁 때는 비닐과 부직포를 덮어주고 아침에는 벗겨주다가 다섯 잎이 생기면서부터는 비닐과 부직포를 치우고 비닐하우스의 개폐기만 열었다가 닫아주기만 했다. 정식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에 적응 훈련인 셈이다.

모종을 관리하면서 배추를 도려낸 밭을 설거지했다. 흙이 진 상태에서 배추 작업을 했기 때문에 트럭 바퀴 자국으로 깊게 골을 내놨고 온 밭이 짓이겨져 제대로 개판이었다. 밭이 충분히 마르지 않았는데 또 비 예보가 있어서 태국 일꾼들과 어렵게 비닐을 걷느라 예년의 인건비 3배를 썼다. 서둘러 퇴비를 뿌리고 남편이 쟁기질을 하는데 미처 마치기 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일주일 내내 비가 왔다. 7월 장마도 빨래할 짬은 주는데 뜬금없는 겨울 장마는 정말 인색했다.

모처럼 날이 맑았지만 밭이 질어 정식을 위한 작업은 할 수 없어서 비닐하우스 청소를 하는데 등줄기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포근했다. 저녁부터 눈과 함께 또 한 차례 한파가 온다더니 밤새 태풍처럼 거친 바람이 불면서 눈발이 날렸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부리나케 나가서 모종을 둘러보니 잎들이 바닥 쪽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순간, 가슴께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간밤의 낮은 온도에 냉해를 입었을까 아니면 뿌리에 염증이라도 생겼을까, 곧 정식해야 할 모종이 회생 불능이면 어떤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 가빠지는 숨을 참으며 시들어 있는 모종을 뽑아 봤다. 세상에! 뿌리를 감고 있는 상토가 바싹 말라 있었다. 포트 윗부분에 거무죽죽한 이끼가 덮여 있었는데 햇빛이 부족해서 생긴 현상인 듯 싶었다. 영락없이 물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일부러 물을 덜 줬으니 모종이 시들 수밖에. 풍년에 굶어 죽는다더니.

잠시의 악몽에서 빠져나와 시든 모종에 물을 주는데 겨드랑이에서 날개라도 돋는 양 몸과 마음도 가벼워지고 감사한 마음이 샘솟는 듯했다. 널뛰기하는 농산물 가격 같은 시련에 비하면 일시적으로 궂은 날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자조하며 집에 오는 길에 웃거름 뿌려 놓은 보리를 살피러 논으로 갔다. 논둑 곳곳에 초록색 바탕에 하늘색 물감을 살짝 덧칠해 놓은 듯 큰개불알꽃 무더기가 지천이다. 별꽃만큼 작은 꽃들이 참으로 해맑다. 큰개불알풀은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만만한 풀이라 그다지 밉상이 아니다. 굳이 호미를 동원하지 않고 손으로 뽑아도 쉽게 뽑히고 밭에서 키우는 작물과 경합해서 이기려는 근성이 없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경쟁해야 할 대상이 없는 시기와 생존지를 선택한 모양이다. 내 삶도 경쟁에 늘 취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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