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다금발이냐?”

  • 입력 2024.03.10 18:00
  • 수정 2024.03.10 18:29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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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소개된 서학 관련 책자가 줄잡아 칠십 종이라 하니 더 궁구할 필요가 있겠지요. 필상 형님은 한양 나들이를 하시거든 다른 책자도 구해보시지요.”

필상을 보고 나서 병호는 다시 말하였다.

“저는 저 서양 사람들이 의지를 강조한다고 느꼈습니다. 사람에게만 영혼이 있다는 말도 사람이야말로 더 높은 의욕을 가진다는 논변이겠지요. 그 의지 때문에 신부라는 자들도 이 먼 곳까지 찾아왔을 겝니다. 리마두라는 자만 해도 그 방대한 경전을 어찌 독파했는지 유학을 공부하는 제가 벅찰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우리도 더 알아보고 고민하자 요청드립니다.”

병호의 요청에 희옥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기범이는 곰방대를 갈무리하였다.

“문인화를 상기해봅시다. 먹으로 농담을 자아내 산과 물을 짓고 낚시하는 노옹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여백인데 그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풀이며 나무며 사람과 하늘이 있지요. 세상이 사람만 위해서 있는 건 아니란 뜻입니다. 되려 그들 중 하나요, 달리 특별할 게 없는 종자지요. 천명이란 말이 있고 하늘 무서운 줄 알라고 합니다. 그 천이니 하늘이 바로 여백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저 서학에서는 모든 것이 천주의 뜻이라 하니 여백은 없지요. 천주와 소통하고 느끼는 사람만 주인이라면서 다른 쪽을 침략하는 이치가 서학의 요체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양선을 포함해 양이들의 기물이 천주학에 바탕을 두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단서를 찾을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에 기초를 두었든 말든 양이들은 저 기물을 이용해 약한 나라를 침범하지 않습니까. 남의 것을 빼앗는 이치가 즐거움 때문이랄 순 없으니 즈이끼리 살찌우려는 수작입니다. 아무리 사람 사는 편리가 도모된다 해도 그 기물이 나만 배불리는 일에 쓰인다면 우린 물어야 합니다. 그건 정말 위대하고 대단한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서방님!”

필상을 부르는 행랑아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해 열다섯인 녀석은 필상이 서당까지 주선하였으나 간신히 문자를 깨치고는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거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어떤 걸인이 찾아왔습니다. 누구냐 물어도 서방님만 보겠답니다.”

“찾을 사람이 없을 터인데…….”

필상이 아이를 따라 대문간에 와서 보니 정말 거렁뱅이가 섰는데 머리는 산발이요, 걸친 것은 잠방이였다. 미투리는 헤져 걸치지 않은 것과 진배없고 언제 목간을 했는지 손등은 거북등 한가지였다.

“날 찾는다니 뉘신지요?”

“선비님……!”

자신을 선비님이라 부를 사람을 떠올려보며 필상이,

“혹시…… 다금발이냐?”

하고 묻자 거렁뱅이가 흐느끼며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다금발이가 맞구나! 그렇지?”

필상은 나무껍질 같은 손을 잡으며 그가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다금발이의 손을 끌면서 필상은 심부름하던 아이에게 밥을 내오라 이르고 가마솥에 물도 끓이란다고 덧붙였다. 다금발이와 사랑채 마당에 들자 이 엄동에 누구인가 내다보던 사람들이 마루로 뛰쳐나왔다.

“손님이 오셨다더니 요란하게도 오셨구려.”

기범이의 말이었고 필상이 토방에 오르며,

“이 사람들아, 누누이 말하던 강화도의 다금발이일세.”

그래놓고 방을 가리켰다.

“어서 들게.”

마루에서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는데 다금발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몰골로 어찌 방을 더립히겠습니까.”

“방 더러워지는 게 대순가. 얼어 죽겠네.”

“그래도 이대로는 어렵습니다.”

그 모습에 기범이가 한 마디를 더 질렀다.

“여기 그걸 따질 사람은 없으니 못이기는 척 드시구랴. 옷도 부실하구마는.”

“아닙니다. 그리는 못합니다.”

“허허, 참!”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에 희옥이가 덮고 잔 이불을 꺼내 둘러주었다. 행랑채 어멈이 밥과 반찬을 가져왔고 병호가 방에 있던 술상을 내오자 다금발이는 손 가는 대로 음식을 우겨넣었다. 고기는 먹어 본 놈이 잘 먹고 밥은 굶은 놈이 잘 먹는다더니 과연 밥 두 그릇을 꿩탕에 말아 핥듯이 비웠다. 그때 물이 끓는다 하여 헛간에 목간통을 차리고 필상은 아내에게 옷을 내오게 하였다. 몇 순배 잔이 돌자 무명으로 동인 머리에 목화솜 누빈 방한복 차림으로 다금발이가 나타났다. 살비듬은 없더라도 강화도 소년의 눈매가 뚜렷하여 필상은 그가 낯설지 않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빈말이구먼. 육년 만에 이리 헌헌장부가 되었으니.”

필상이 환한 낯꽃으로 병호네를 소개하였다.

“인사부터 하게. 여긴 내 동무들이네. 나이는 자네보다 한 살, 세 살 많으니 형이라 하면 되겠네.”

다금발이가 허리를 숙이자 병호네도 반절을 하였다. 필상이 잔에 술을 쳤다.

“술은 마실 줄 아는가?”

“술을 못할라구요. 제 겪은 일을 알면 놀라실 겁니다.”

“자네가 건넨 수발총은 요긴하게 쓰고 있네. 아까 먹은 꿩탕도 게서 나왔지. 그렇잖아도 이양선이 침범했다기에 걱정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사람들이 주목하자 다금발이는 한 잔을 더 비웠다.

“작년 여름에 이양선을 타고 온 양이들이 처음 점령한 곳은 초지진이었습니다. 그들은 갯벌을 극복하여 초지진에 들었지만 조선군이 떠난 뒤였지요. 양이들은 그곳을 파괴한 뒤 다시 덕진진 성벽을 허물고 북상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동할 때 염하에서 이양선이 보조를 맞춰 올라왔지요.”

이야기를 듣는 필상의 눈에 염하며 훈련도감 따위가 좌르륵 펼쳐졌다.

“육로와 해로로 양이들이 광성보에 접근하는데 저는 대모산 중턱에서 낱낱이 목격했습니다. 이양선이 먼저 포를 쏘았고 육로의 양이들도 포탄을 날렸습니다. 조선군이 광성보를 방비하고 있어 하늘이 까매지도록 포격만 하였지요.”

“육시럴 놈들!”

병인년 이야기 때처럼 희옥이가 방바닥을 쳤다.

“병인년과 달리 이번에는 도망치는 군사가 없었습니다. 북과 꽹과리를 치고 나발을 불며 저항했지요.”

술을 들이켤 때마다 사람들 목에서 울컥대는 소리가 났다. 기범이가 호랑이 눈을 치떴다.

“그래 광성보라든가 그곳은 어찌 되었나?”

“성곽이 부서지자 양이들이 언덕으로 돌격하였습니다. 화약이 떨어진 조선군은 칼과 창을 들고 맞섰지만 중군을 호위하던 오륙십 명이 죽고 나머지는 속속 자결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대모산 중턱까지 들려왔습니다. 철수하기 전에 양이들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통분을 못 이긴 희옥이는 조선 병졸이 어머니를 부르더라는 얘기에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주인댁도 피난을 하지 않았던가?”

“그럴리가요. 양이들이 작약도로 물러가자 언제 재침할지 모른다면서 피란길에 올랐지요. 옛일이 생각나 그때도 저는 남았습니다. 그 밤에 배를 구해 출발했지만 인근을 순찰하던 이양선에서 조선병인 줄 알고 포격을 가했습니다.”

“저런, 그래서 어찌 되었나?”

“떼죽음하였지요.”

그 집 식구들 얼굴을 기억하는 필상이 쩝 입맛을 다셨다.

“거 참, 씨언한 소리도 다 있구먼. 천벌을 받은 게지.”

기범이는 오히려 체증이 내려간다는 투였다. 병호가 물었다.

“양이들은 다시 오지 않았나?”

“작약도에 머물러 조선 측과 협상하더니 물러갔습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놓고 협상이며 기도라니. 그노무 천주를 만나면 나는 모가지를 비틀고 말 테여.”

기범이가 소리를 질렀고 필상이 최근 근황을 물었다.

“그래 그 후엔 어찌 지냈는가?”

그때 기범이가 끼어들었다.

“왼종일 방구석만 데울 참이오? 남은 이야기는 옮겨서 들읍시다. 전주 어디 색주가 같은 데서 패싸움이라도 벌이면 좋겠구마는.”

“그럽시다. 동무도 생겼는데 구들장 인사가 다 뭐요?”

희옥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세나. 해가 짧으니 태인으로 가지 뭐. 거기 수령놈을 만나거든 곤장 삼십 도를 돌려가며 치세그려.”

순식간에 의기투합이 되어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수류면 장터를 통과한 일행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솟튼재를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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