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상이 ‘천주실의’를 집어 들었다

  • 입력 2024.03.03 18:00
  • 수정 2024.03.03 19:06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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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과 독후감상을 하기로 한 날 필상은 소피가 마려워 새벽잠을 깼다. 희옥이가 애처럼 이불을 차낸 채 코를 골았다. 희옥이는 새벽길 나설 일이 꺽정스러워 하루 먼저 들어와 필상과 담소하고 잠들었던 것이다. 목화솜 덮인 듯한 세상 위로 눈송이가 쌓였다. 소피를 눈 필상은 다시 자리에 들었다가 비질 소리에 눈을 떴다. 문틈에 눈을 대보니 희옥이의 비질을 따라 빗살이 만들어졌다. 박동을 따라 콧김이 뿜어지건만 동저고리 바람으로도 그는 추운 기색이 없었다. 조반을 하자 햇살이 좋아져 문을 열어놔도 춥지 않았고 빗살도 그늘 든 곳만 남아 있었다. 그렇더라도 병호와 기범이는 솥튼재로 돌아오는지 시간이 지체되었다. 주안상을 보아달라는 요청에 무를 채 썰어 넣은 꿩탕이 나와 한 모금 할까 망설이는데,

“길이 사납구려.”

하는 소리가 들리고 행전과 감발을 푼 두 사람이 안에 들어섰다.

“어서 한 잔 주시우. 꽁꽁 얼었는걸.”

기범이가 술잔을 내밀자 병호가 주의를 주었다.

“천천히 마셔. 초장부터 횡설수설할라.”

“횡설수설이란 누굴 두고 하는 말인가? 이강주 몇 잔에 뻗어버리고선 집에 가겠다 내뺀 사람이 여기 있네.”

희옥이가 이강주를 마시고 얼굴이 벌개지던 병호를 상기시켰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 일을 모르는 기범이가 물었고 필상이 답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네.”

술이 두어 순배 돌자 바깥에서 들어와 푸르뎅뎅하던 병호와 기범이의 입술에 핏기가 돌았다. 필상이 젓가락을 놓더니『천주실의』를 집어 들었다.

“돌아가며 소감을 나누고 의견도 붙입시다. 자구를 들어 인용하는 것도 가하니 맘껏 개진합시다. 누가 먼저 하시려나?”

“먼저 입 열 사람이야 정해져 있지요.”

사람들이 기범이를 보았다.

“아따 먼저 하란 소리구만. 까짓거 그럽시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며 잔을 비웠다.

“운을 떼게 되었으니 얹어두겠소. 이 책은 중국 선비가 묻고 서양 선비가 답하는 식인데 서양 선비란 책을 쓴 리마두(利瑪竇)겠지요. 서양 선비는 천주가 만물을 창제하고 모든 일을 주관한다 하였습니다. 그런 존재가 없다면 세상이 어찌 이리 일목요연하게 유지되겠느냐 반문하였지요. 대체나 우주만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동과 서가 한가지로 관심사인가 봅니다. 이에 관해 자사는 상천지재(上天之載)는 무성무취(無聲無臭)라 하고 정자(程子)는 충막무진(冲漠無眹)이요, 주자는 무극지진(無極之眞)을 언급하였습니다. 또 불가에서는 연기라 하였지요. 그런데 이쪽 말은 사물의 생김과 존재의 원리를 말하지만 저쪽은 천주가 빠끔살이하듯 세상을 짓고 만든 정경을 눈앞처럼 펼쳐 보이더란 말입니다. 헌데 그토록 생생하므로 도리어 못 미더웠습니다.”

“그저 옛이야기로 여길 순 없겠소? 우리에게도 마고할미 설화가 있잖소?”

논의를 진전시킬 양인지 병호가 토를 달았다.

“물론 그렇소. 하지만 이야기를 이야기로 들어야지 사실로 단정하여 못 믿으면 배척하고, 이야기 속의 믿음을 위해 목숨까지 던진다면 그 편일랑은 들지 못하겠소. 이야기란 삶의 방편을 생각하게 하면 그만이지 철석같이 믿으라면 곤란하잖소. 믿음을 전제로 성립되는 일이란 그만큼 미덥지 못하단 뜻입니다. 세상이 혼탁해지자 그런 세상을 구원하려고 천주가 야소를 보냈다는데 동정녀를 어머니로 택해 남녀 교감 없이 잉태되었답디다. 천주가 있는데 또 태어났다면 천주가 둘이란 뜻이니 이상도 하려니와 남녀의 교접 없이 태어났다는 말도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기범이는 그릇을 들어 동치미를 마셨다. 노름판도 아니건만 희옥이가 소매를 걷었다.

“나도 한 마디 합시다. 내게는 출가한 조카가 둘씩이나 되지 않소. 불가의 말과 유사한 대목이 많아 유심히 보았소. 사람이 죽으면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는데 이는 불교에서 하는 말과 같습디다. 하지만 이 책에선 불교의 윤회와 왕생이 이로움만 말하지만 서학의 천당 지옥 설법은 이로움과 해로움까지 동시에 드러내 사람을 의로움으로 끈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은 가짜라 하고 내세가 진짜라 말합니다(今世僞事已終 卽後世之眞情起矣). 저는 천당이든 극락이든 사후세상을 본 사람은 만나지 못했거니와 있다손 쳐도 내가 사는 세상은 가짜요, 죽어서 가는 세상이 진짜란 말에는 찬동하기 어렵소.”

“그 또한 덕행과 선행을 베풀라는 말로 보면 되지 않겠소?”

“그 뜻이 왜 없겠소. 하지만 살아서는 무슨 짓을 하든 죽어서야 행적을 소급해 결정한다면 빨리 죽고 간택만 받으면 그만 아닙니까. 또한 지옥의 형벌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는데 인자한 천주께서 어찌 그리 잔인하단 말이오. 하고 천당과 지옥은 얼마나 크길래 전에 살던 사람과 앞으로 살 사람까지 모두 수용한단 말이오.”

희옥이의 말이 끝나자 엉덩이를 들썩이던 기범이가 끼어들었다.

“희옥이가 농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말도 뜨겁구랴. 초목에게는 생혼(生魂)이 있어 그것이 생기고 자라게 하지만 초목이 말라비틀어지면 생혼도 없어진다 합니다. 또한 금수에게는 각혼(覺魂)이 있으므로 성장을 도울 뿐 아니라 보고 듣고 맛보고 지각하게 하지만 몸이 죽으면 역시 없어진다 합디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영혼(靈魂)이 있어 지각하고 추론하고 분석하는 능력까지 있다면서 초목이나 금수와 구분하니 정묘하고 그럴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변설 또한 보거나 만질 수 없는 형이상의 영역이니 주장일 뿐입니다. 헌데 정작 놀라운 것은 초목과 금수가 죽으면 생혼 각혼은 사라지지만 사람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천당이나 지옥에 든다고 한 대목입니다. 왜 그런단 말이오? 천당과 지옥이 좁아서 생혼과 각혼은 없애고 영혼만 들이는 겝니까? 하면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범이나 이리는 어떤 일을 저질러도 지옥 갈 염려가 없으니 나는 그리로 태어날 걸 그랬소.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라지지 않고 영생한다면 얼마나 지긋지긋한 일이오.”

“자자, 너무 뜨거워지진 말고 한 잔씩 하고 가세나.”

필상이 제동을 걸면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기범이가 곰방대를 꺼내 불을 붙이자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필상이 어흠어흠 목을 풀었다.

“사오십 리 북쪽에 바우배기란 곳이 있네. 신유년에 게서 붙잡힌 천주학 부부가 있는데 숲정이에서 목이 잘렸다네. 그런데 그때 참수된 사람 중에 아내 되는 이가 옥에서 쓴 편지가 있네. 그이의 법명이 루갈다라더구먼. 바우배기 사는 인척을 통해 쉬쉬하며 전해진 편지를 보게 됐지 뭔가. 그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여적지 기억하는 구절이 있네.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칠 기회가 없어 염려하였는데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어요. 주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승을 내세의 예행쯤으로 여기는 신념이 무서워 학질 앓듯 몸을 떨었네. 이승의 삶이 어찌 그리 하찮단 말인가. 저 산야에 쌓인 눈과 새들을 보라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 여인은 천주의 뜻에 따라 동정을 지키기로 하고서 혼인했다는구먼. 그래 사 년간 부부로 살면서 약조를 지켰다는 게야. 그 또한 나는 무서웠네. 남녀가 몸을 탐하고 어루만지는 일이야 벌 나비가 꽃을 즐기는 것과 같지 않은가. 천지사방이 꽃향기로 가득할 제 남녀가 탐색하고 희롱하는 일이 얼마나 중한가 말이야. 아무런 일면식이 없어도 몸을 합치고 아이를 기르면 정이 생기고 기쁨에 겨워진다네. 어찌 그를 하면 안 되는 일로 알겠는가.”

“남녀 화합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이지요. 한 사람 빼고 여기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희옥이의 우스갯소리에 기범이가 음흉스레 웃었다.

“이런 놀림을 받으면서도 병호 아우는 장가를 들지 않는단 말인가?”

병호는 잔을 비우고 필상을 보았다.

“중신을 서주시우.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나도 장가 좀 들어봅시다.”

“성님이 중신하면 째보든 곰보든 갈 게여?”

“형님이 주선하면 눈이 하나 없대도 나는 할라네.”

그러자 기범이가 필상에게 눈을 끔벅였다.

“성님이 나서야겠소. 어디 눈 하나 없는 처자가 있는지 골라보시구려.”

“눈뿐인가. 곰보에 째보까지 겹치면 더욱 좋겠네그려.”

“그나저나 마저 이야기 합시다. 병호도 말 좀 해여.”

끝내고 술 마실 생각에 희옥이가 재촉하였다. 병호가 목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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