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배고픈 날이면 산으로 갔다② 오디도 따먹고 ‘삐비’도 뽑아 먹고

  • 입력 2024.02.25 18:00
  • 수정 2024.02.25 18:1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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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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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의 먹이를 마련하기 위해서 밭에다 재배하는 뽕나무는 키가 썩 크지 않아서, 어린아이들도 가지를 당겨서 열매(오디)를 어렵잖게 따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산이나 길가에 자생한 뽕나무는 대부분 까마득한 높이의 거목이어서, 동무의 목말을 타고 올라 손을 뻗어 봐야 턱없이 못 미쳤다.

-내가 올라갈 테니까 좀 받쳐 줘.

사내아이 하나가 동무들의 도움을 받아서, 아름드리나무 밑동을 두 팔로 부둥켜안고는 안간힘을 다해 나무를 오르기 시작한다. 뽕나무는 직선으로 곧게 뻗어 올라가는 수종이 아니라 이리저리 가지가 갈라져 자라기 때문에, 어른 키 높이 정도만 어찌어찌 올라가면 그 담부터는, 양발로 이쪽저쪽 가지를 나눠 디뎌 의지하면서 바둥바둥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자칫 바짓가랑이가 찢어져서 밑천이 드러나기라도 하면…사내 녀석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놀려댔고, 멀찍이서 구경하던 여자애들은 줄행랑을 쳤다.

검붉은 오디가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한참 동안 꺾어서 아래로 던지고, 뽕나무 가지에 걸린 고무신짝도 벗겨 내려줬으니 이제 내려와야 하는데…뽕나무든 감나무든 무슨 나무든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어렵고 위험하다. 충청도 청양 출신 홍진수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무줄기를 두 팔로 안고서 타고 내려오다 보면 발 디딜 데가 없으니까. 쪼르륵 미끄러져서 순식간에 두 발이 땅바닥에 닿아요. 그런데 나무와의 마찰 때문에 배에서는 불이 나지요. 그 시절엔 잘해야 홑겹 무명 셔츠 하나만 걸쳤잖아요. 내려와서 보면 살갗이 벗겨지거나 긁혀서 시뻘겋게 부어 있어요. 아, 그래도 참 신기한 게요, 무슨 약을 바르지 않았는데도 며칠 지나면 멀쩡하게 낫는다니까요.”

그렇게 오디를 한 볼때기씩 먹고 나서, 마치 잉크를 바른 듯 푸르뎅뎅한 입술을 하고는 집에 돌아온다. 뽕나무가 있는 마을의 시골 하굣길 풍경이 그러하였다.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어서 뒷동산이 제법 푸른 빛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청길아! 동무들하고 망태 메고 뒷산에 가서 토끼풀이나 좀 베 오너라!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와 보리밥 몇 숟갈로 점심을 때우고 나면, 아이들도 밥값을 하러 나서야 했다. 해는 길고 먹을 것은 턱없이 모자라던 때가 바로 그 시기인지라, 뒷동산 들머리에서부터 아이들은 입이 궁금해지기 시작하는데, 풀밭에는 이미 여자아이들이 나와 있다.

전라도 출신 최송자 할머니는 말한다.

“음력 삼월이 돠면 온갖 풀들이 올라오는데, 그때 우리한텐 삐비 뽑는 게 일이지요. 그런데 시기를 잘 맞춰야 해요. 조금 지나면 꽃이 피어버려서 못 먹어요. 줄거리에서 삐비를 쑥 뽑아서 벗기면 하얗고 말랑말랑한 속살이 나오거든요. 고놈을 씹으면 얼마나 달콤하고 고소하다고요. 우리 할머니가 그걸 아주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한나절 내내 풀밭에 앉아서 하나하나 뽑아 모아요. 한 움큼이 차면 고무줄로 묶어서 다발을 만들어서는 할머니께 갖다 드렸지요.” 강원도 출신의 고등학교 교사 이청길씨도 비슷한 추억이 있다.

“삐비를 뽑아서 야들야들한 속살을 씹으면 새콤달콤해요. 내가 기억하기로는 삼키지는 않고 단물을 빨아먹고 남은 건 뱉어냈던 것 같아요. 그거 먹는다고 배가 부를 리는 없지만, 그 시기에 당분 섭취가 워낙 모자라서 그랬는지 그 삐비 단물이 아주 맛있었어요.”

전라도 출신의 할머니와 강원도 출신의 중년 남자가 모두 ‘삐비’라고 부르고 있는 그것은 국어 사전에는 ‘삘기’로 올라 있다. 산 들머리의 길섶이나 풀밭에 무더기로 나 있는 ‘띠풀’의 어린 이삭을 일컫는 말인데, 그 어린 풀 이삭을 쑥 뽑아서 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띠풀의 보드라운 잎사귀 하나를 따서 입에 물고 풀피리 삼아서 불면 삐이익, 소리가 나는데 그래서 삘기 혹은 삐비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풀밭을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앞서가던 아이가 소리친다.

-와아, 여기 딸기 겁나게 많다. 사방이 딸기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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