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나리봇짐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꺼내다

  • 입력 2024.02.11 18:00
  • 수정 2024.02.11 18:41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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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부터 희옥이가 방 안팎을 수석이며 어찌나 어서 가자 보채쌌는지 필상은 여독을 풀 새도 없었다. 전주 남문밖시장에서 배를 채우고 책방거리 지물전에서 한지 한 동을 희옥이에게 지운 필상은 앞서서 흑석골을 넘었다. 기범이가 돼지 서리를 했다는 구이동을 통과할 즈음 이마를 훔치던 희옥이가 물었다.

“아니 무슨 한지를 동으로 산답니까?”

필상이 희옥이를 놀렸다.

“장가 들더니 힘이 떨어진 게로군.”

“한지가 한 동이면 자그마치 이천 장인데 용도가 궁금해 그러지요. 괘서(掛書)라도 붙이시려오?”

“곤장까지 맞았다는데 다음엔 붙어야지. 그나저나 병호 아우도 장가들 나이가 돼 가잖은가? 그자는 여인네 속살이 얼마나 보드라운지도 모를게야.”

뻔질나게 드나들던 숯막을 지나 그들은 엄재를 내려왔다. 술도가에서 탁주 한 동이를 사들고 해가 뉘엿해져 기범이네에 들어서자,

“아이구 성님, 각중에 웬일이오?”

두런대는 소리를 듣고 집주인이 뛰어나왔다.

“아우님 보러 왔지. 이거나 받게.”

한지 다발을 건넨 필상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병호 아우는 어디 갔나?”

“말도 마시우. 마누라 떠난 뒤에『금강경』하고『도덕경』을 뒷간에 놔두지 않았겠소. 똥 눌 때 보고 있으면 구린내도 덜 납디다. 그런데 그때버텀 이자가 뒷간만 가면 한나절이구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필상과 희옥이가 뒷간에서 나온 병호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기범이가 술상을 차렸다.

“그나저나 웬 한지를 이리 샀습니까?”

“내가 한양에서 사귄 한량이 한 놈 있다네. 그런데 하룻밤 묵다가 그자의 집에 귀한 물건이 있는 걸 알았지.”

“귀한 물건이라뇨? 그자의 첩실과 눈이라도 맞은 게요?”

기범이였다.

“사람을 물건이라 하겠는가? 하여튼 그 물건을 빌리자 하였더니 쉬쉬하며 안 된다지 뭔가. 그래 술 한 잔하자면서 죽치고 앉아 버텼지. 결국 술이 나왔는데 나 한 잔 저 한 잔, 또 나 한 잔 저 한 잔……. 그잔 뻗어버렸네.”

“그럼 빨리 들고튀어야죠.”

애가 닳은 희옥이가 소리를 질렀다.

“허허, 내 말을 미리 해주니 편하네그려.”

“정말로 그랬단 말요?”

기범이도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모양이었다.

“품에 넣고 냅다 줄행랑을 놓았지.”

“형님에게 그런 손버릇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어디 물건 좀 보십시다.”

병호가 손을 내밀자 필상이 사람들을 쓱 보더니 괴나리봇짐에서『천주실의(天主實義)』라 적힌 책자 두 권을 꺼냈다. 제목을 본 병호가 한 권을 채가고 다른 한 권은 기범이가 집어가 도깨비 기왓장 뒤듯 들춰 보았다.

“누가 하느님을 공허한 것이라 하겠는가? 공허한 것은 한나라 명제 때 천축에서 들어온 불교다(夫誰以爲空? 空之設 漢明自天竺得之). 명나라 풍응경(馮應京)의 서문인데 불교를 공허한 것이라 말하는군.”

병호가 서문 한 구절을 읊고는 희옥이에게 책을 넘겼다. 기범이도 본문 한 대목을 읽었다.

“평생 마음을 바꾸지 않고 선행을 하면 천당의 복락을 누리도록 상을 준다(故終身爲善 不易其心 則應登天堂 亨大福樂而賞之). 반면에 평생 마음을 바꾸지 않고 악행을 하면 지옥에 떨어트려 벌을 준다(終身爲惡 至死不悛 則宜墮地獄 受重禍灾而罰之). 이는 불가에서 하는 말이 아닌가?”

“자자, 책이 손에 들어왔으니 잔들을 비우세.”

필상이 잔을 들며 촉구하자 병호가 한지 다발을 가리켰다.

“이 책을 필사하라고 저걸 사오셨구려.”

“필사해서 읽고 소감을 말해보세나. 내야 도적질까지 하였으니 필사는 아우님들 몫이네.”

“그럽시다, 까짓것. 한 열흘 필사하고 꼼꼼히 읽으려면 한 달은 걸리겠소.”

“모처럼 만났으니 오늘은 마시고 낼부텀 시작합시다.”

그들은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술로 밤을 샌 후 필상은 상두재를 넘어 집으로 가고 남은 사람은 오늘만 마시자 하여 또 술판을 벌였다. 내친 김에 희옥이는 필사를 마친 뒤에나 돌아가겠다 하여 이튿날도 술판이 벌어졌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하루만 더 마시자 해서 새로 사온 독을 열었다. 나흘째가 돼서야 장을 나누어 필사를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진척되어 며칠 만에 두 권을 끝낸 희옥이는 필사본을 끼고 봉상으로 넘어갔다.

기범이의 집에『천주실의』를 남겨두고 귀가한 필상은 피로해진 심신을 안정시키며 조용히 정양하였다. 커 나오는 아이들을 불러 담소하고 밤에는 부인과 운우지정을 나누며 사는 재미를 만끽하였다. 십 년간 경서를 읽은 후 십 년간 떠돌기로 한 결심을 그는 지켜오고 있었다. 각처를 떠돌면서 양이들의 기물을 목격하고 조선을 움직이는 자들이 얼마나 안이한지, 변방을 사는 백성들은 국가니 뭐니 그런 허울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생활도 끝날 기미가 보이는 듯하였다. 무언가 겪어 깨닫는 일이야 숨 붙어 있는 한 끊일 일이 아니려니와 이제는 목표를 두고 살 방편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아우들과 부대끼다 보면 호수의 얼음이 쩡 갈라지듯이 어떤 파정의 순간이 찾아올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잠만 자다가 어떤 날은 수발총을 꺼내 모악산을 오르면서 그는 필사 끝낸 책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날도 오리 사냥이나 나갈까 궁리중인데 아우들이 들이닥쳤다.

“그 책이 그리도 무거워 함께 들고 오는가?”

병호가『천주실의』원본을 내밀었고 희옥이가 답변하였다.

“동학사 강백이 금산사에 왔다 하니 얼굴도 익히고 말씀도 청할까 합니다.”

“동학사 강백께서 우리 같은 자들을 만난다던가?”

그러면서도 필상은 의관을 차렸다.

“희옥이의 조카뻘 되는 이가 동학사 강백으로 있다는군요.”

그들은 필상의 집을 나와 오리알터를 지났다. 희옥이만큼은 아니어도 필상 역시 머리 하나가 솟은 체수라 둘은 큼직하고 나머지는 작달막하였다.

“헌데 나이가 몇이길래 강백이 되었단 말인가?”

필상이 묻고 희옥이가 답하였다.

“나보다 여섯 살 위니 스물넷이지요. 작년에 동학사 주지가『금강경』강백으로 앉혔다는데 돌연한 사태이긴 합니다.”

“잘난 사내로세.”

그들은 서낭당에 들러 미륵할미에게 합장한 뒤 일주문을 지났다. 조금 올라가니 금강문이 나왔고 천왕문을 통과하자 미륵전이 보였다. 미륵전은 팔작지붕 삼층 건물로 겹처마였으며 추녀에 활주를 세웠고 미륵장륙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편으로 가자 동쪽 건물 댓돌에 미투리와 당혜가 보였다.

“스님, 기십니까?”

조카라면서도 희옥이는 목소리가 조신하였다. 문이 열리며 팔척은 서운하고 구척에 댈 법한 거한이 밖을 굽어보았다. 머리는 까슬까슬하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주먹이 들어갈 만큼 입이 큰 자였다. 뒤에는 또 분홍 저고리에 댕기머리 처자가 손을 모으고 있는데 웬만한 장정보다 손가락 마디 가웃은 더 커 보였다. 스님의 들어오라는 시늉에 연장자인 필상이 인사말을 건넸다.

“오누이의 다정함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들이 남매임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경허입니다.”

스님이 법명을 밝힌 뒤 희옥이가 병호와 기범이를 소개하였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분홍 저고리 처자가 남을지 말지 망설이더니 치마를 끌며 나섰다. 경허가 다관에 작설을 넣고 화로의 주전자를 들어 물을 부었다.

“아재께서 동무님을 보았으면 하더니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동학사 강백께서 오셨다 하니 가르침을 청할까 합니다.”

“저는 아는 게 없으니 깨우쳐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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