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태풍의 순기능과 역기능

  • 입력 2024.02.04 18:00
  • 수정 2024.02.04 18:25
  • 기자명 김형표(제주 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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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표(제주 성산)
김형표(제주 성산)

2023년은 모처럼 태풍이 없는 해다. 8월 말과 10월 초 사이 제주와 일본 사이를 지나는 태풍은 평균 3회 정도인데 몇 년 만에 태풍 없는 해를 맞이했었다. 거대한 바람과 쇠못 같은 폭우를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은 그 위력을 실감하지 못한다. 남한 인구의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는 서울과 경기 일원, 그리고 서해안 쪽은 태풍의 경로가 아니며, 제주와 남해안을 거친 태풍은 대지와 만나면서 그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한반도 중반부에 이르게 되면 위력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평생 태풍의 비와 바람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만일 인구밀집지역으로 태풍이 상륙하게 되면 도시의 모든 가로수와 간판 신호등이 쓰러지며 재앙이 될 것이다. 강력하게 고정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은 바람의 위력에 꺾어지게 된다. 어떤 이들에게 태풍이 TV 뉴스에나 나오는 재난영화 정도로만 기억되는 이유다.

한반도의 농업에는 어느새 태풍의 순기능이 생겼다. 역기능이 태풍으로 많은 것이 파괴되어 복구되고, 사회가 자연재해에 대응할 힘을 기르는 것이라면, 순기능은 말 그대로 좋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그 순기능은 바로 농산물의 자연적 소멸이다. 말 그대로 농부들이 애써 재배한 무나 배추, 브로콜리 등이 태풍에 의해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앙에 가까운 파괴가 순기능으로 돌변하게 된 것은 한국 농산물 시장의 특수성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농산물의 생산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기계 작업의 확대로 생산이 늘어나는 반면, 인구는 줄어들어 수요가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그 인구마저 요리를 하는 인구보다 요리를 하지 못하거나, 요리를 하지 않는 인구 비율이 늘어났다. 실제로 과거 요리를 담당하던 여성요리의 시대에서 여성들의 사회진출로 여성들이 요리에 집중할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사회적 인식조차 ‘왜 요리를 여성만 담당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성과도 마주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요리를 ‘여성의 노동’으로 인식하는 시대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생산은 늘고 수요는 줄다 보니, 소위 과잉생산의 시대가 시작됐는데 그 내부는 더 들여다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다. 사람들이 요리를 직접 하지 않는다고 해서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농산물은 모든 식재료의 원료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직접요리가 줄어든다고 해도 사람들이 먹기를 지속한다면 농산물의 소비는 원활해야 맞다. 문제는 사람들의 직접요리를 대행하는 식당이나 식품기업, 식품유통업체들이 국산농산물에 대한 선호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동남아나 중국의 값싼 농산물을 수입해 수익을 늘리려는 유통업체가 증가하고, 소비자들 또한 식재료의 원료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크게 따지지 않게 돼 버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식당의 종업원들조차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됐고, 중국산 김치가 식당의 김치를 점령한 마당에 한국산 배추가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거대 식품기업들은 농산물, 즉 식품의 원재료 자체를 꺼리게 됐다. 이를테면 양배추 대신 양배추 엑기스라거나, 생감자 대신 감자칩 같은 것들을 선호하게 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원료의 수급도 불안정하고, 모든 농산물은 부피가 크고 세척 등의 가공에 거대한 시설과 공간이 필요한 반면, 가공된 원재료들은 적당한 비용만 지불하면 구매가 편리하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그게 더 쉽고 편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그 방향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이 있다. 정말 먹어도 되는가다. 썩지 않는 햄버거와 썩지 않는 빵이 상식인 시대에서, 자연스럽게 썩어가야 할 것들이 썩지 않도록 화학처리를 한 식재료들을 과연 인간이 먹어도 무해한가에 대한 논의다. 저 멀리 칠레에서 수입된, 한 달 이상 배를 타고 운반된 싱싱한 포도와 태평양 너머 미국에서 건너온 싱싱한 오렌지와 레몬, 자몽들을 생각해보라. 과연 인간이 싱싱한 과일들을 한 달 이상 싱싱하게 유통시킬 수 있는 천지개벽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만일 화학물질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면 사람이 먹어도 되는가다.

올해의 제주 농산물 세상은 절망이다. 월동무와 당근, 브로콜리 등 그 어떤 월동채소도 생산비를 보장받기 어려울 정도다. 태풍이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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