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명카수’가 되는 길⑧ 꿈은 이뤘으나 … 갈채는 짧았다

  • 입력 2024.02.04 18:00
  • 수정 2024.02.04 18:1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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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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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을 내겠다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기야…이다음에 늙어서 ‘나는 쇼단의 무용수였다’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가수였다’고 기억하는 게 낫겠지. 그럼 ‘기념 판’으로 몇 장만 내자.

-나한테 필요한 것은 노후의 추억거리가 아니에요. 여러 말 말고 곡을 받아서 일단 취입만 하게 해줘요. 레코드 회사를 섭외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허허, 참. 당신 나이가 서른일곱이야. 팔팔한 젊은 애들이 수두룩한데 어느 회사에서 당신을 신인가수라고 레코드 만들어서 홍보해 주겠어?

-당신, 내 꿈이 가수라는 것 잘 알잖아요. 그리고 내 고집이 얼마나 센 지도. 홍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취입만 하게 주선해줘요.

그동안 쇼단에서 무명의 무용수로, 코미디언으로, 사회자로 떠돌다 보니 어느덧 서른일곱 살이 된 김미성이 가수 데뷔를 하겠다며 음반 취입을 주선해 달란다. 그가 음반을 내도록 도와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대상은 이혼한 전 남편 ‘타미 김’이다. 숱한 가수들을 발굴해서 데뷔시킨, 가요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통하는 그였지만 김미성이 가수가 되는 것만은 말려 왔었다. 하지만 결국 김미성의 고집이 통했다. 타미 김이 섭외해서 연결해준 인물은 1970년대에 <고목나무>라는 노래로 인기를 끌었던 가수 겸 작곡가 장욱조였다.

이렇게 해서 1977년에 장욱조 작곡의 <아쉬움>이 수록된 첫 정규앨범이 발표된다. 김미성의 출세작이다. 이때 김미숙에서 김미성으로 예명을 바꾸게 되는데 코미디언 서영춘이 지어준 이름이라 한다.

1978년에는 역시 장욱조가 작곡한 또 하나의 히트곡 <먼 훗날>이 실린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고, 이어서 남국인 작곡의 <꿈속의 거리> 등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인기 가수로 급부상한다.

“<먼 훗날>과 <아쉬움>이 히트할 무렵에 부산에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어느 날 새벽에 숙소를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는 ‘보림극장에 갑시다!’ 그랬더니 운전기사가 이 새벽에 거긴 왜 가냐고 의아해하더라고요. 그날 저녁에 거기서 쇼 공연을 하기로 돼 있었거든요. 내리자마자 간판부터 올려다봤지요. 간판 맨 위쪽에 코미디언 배삼룡, 가수 윤수일, 최헌 그리고 김미성의 얼굴이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올라있는 걸 보고는 울컥해서 한참 동안 서 있었어요.”

광고 전단이나 극장 간판의 맨 아래쪽에 ‘기타 출연자’로 손톱 만하게 들어있던 자신의 얼굴을 맨 위쪽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물경 20여 년이 걸린 것이다.

김미성의 인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가요 팬들의 갈채를 오래 만끽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승용차 운전사가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사사고를 내고 말았다. 충격에 휩싸인 김미성은 힘겹게 사고 뒤처리를 한 다음에, 빈털터리로 훌쩍 일본으로 떠났다. 나한테는 “10년 동안 일본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고만 말했었는데, 나중에 어느 매체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보니 비자 문제로 불법 체류자가 되어서 일본에서 장기간 ‘노숙자 생활’을 한 것으로 기술돼 있다.

서기 2000년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잊힌 지 오래였고, 더불어 ‘뽕짝’이라고 불리던 트로트 가요도 저만치 구석으로 몰려 있었다. 귀국 직후, 이정현이 테크노 댄스를 추면서 <와>, <바꿔> 등을 부르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격세지감이 들더라 했다.

하지만 김미성은 내가 만났던 2003년 여름에도 여전히 주눅 들지 않은 현역이었다. 환갑이 넘은 그 노(老)가수는 젊은이들도 주저할 파격적인 복장을 하고서 <서울로 가는 소>라는 자신의 새 노래를 선전하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김미성은 세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어린 시절의 김청자는, 궁핍했던 시절에 늘어진 곡조의 유행가를 입에 달고 지냈던 우리네 소년기의 추억을 일깨운다. 쇼 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얻은 이름 김미숙은, 그 시절 대중문화 종사자들의 곡절 많은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예순한 살의 현역가수 김미성…그의 주름진 얼굴에 우리들의 위안이었던 뽕짝 가요의 애환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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