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임조합장제, 조합원이 거부한다”

이천 A농협, 조합장직 상임→비상임 전환 시도 논란

법정 의무전환 기준 넘었지만 … ‘실질적 폐단’ 여실

대의원 중심 토론활동 통해 조합원 반대 의사 구체화

  • 입력 2024.02.04 18:00
  • 수정 2024.02.04 18:18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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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경기 이천의 한 지역농협에서 ‘비상임조합장’ 논란이 불거졌다. 농협이 조합장직을 상임에서 비상임으로 전환하려 하는데, 일부 대의원들이 “조합장 임기 연장을 위한 술수”라며 강력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이 농협 대의원들은 자체적으로 논의 기구를 만들어 조합의 중요 사안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농협 민주화의 관점에서 주목해볼 만한 모습이다.

자산규모가 2,500억원 이상인 지역농협은「농업협동조합법(농협법)」에 따라 상임이사를 두고 조합장을 비상임화해야 한다. 경제규모가 큰 만큼 경영은 전문경영인인 상임이사에게 맡기고 조합장은 회원 관리나 대외활동에 집중케 하려는 취지다.

이천 A농협은 2021년부로 자산 2,500억원을 돌파해 지난해 11월 정기총회에서 조합장직을 비상임화하는 안건을 상정했다. 하지만 대의원 67%의 반대로 의결이 무산됐고, 두 달여 뒤인 이번 정기총회에 재상정이 추진되면서 대의원-조합장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A농협 대의원들이 무리하게 준법경영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농협 비상임조합장의 실태를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비상임조합장들이 상임이사 자리에 측근 또는 힘없는 퇴임 직원을 앉혀 놓고 조합의 모든 경영에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기자나 연구자들이 법 취지에 맞는 우수 경영사례를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더 큰 문제는 비상임조합장에 임기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농협법은 상임조합장 임기를 2연임(3선)까지만 허용하는 데 반해 비상임조합장 임기엔 아무 제한장치를 두지 않고 있다. 때문에 3선째를 맞은 상임조합장들이 임기 연장을 위해 조합 자산규모와 상관없이 조합장직 비상임화에 사력을 쏟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단 비상임화에만 성공하면 현직 조합장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를 발판삼아 장기집권 체제를 시작하고, 오히려 상임조합장보다 훨씬 강력한 ‘조합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즉 현실적으로 법 취지가 구현되지 않고 있는 이상, 법에 따라 조합장직을 비상임화해봤자 ‘현직 조합장 임기 연장’ 외엔 아무 효과도 기대할 게 없으며 오히려 퇴행의 개연성이 크다는 뜻이다.

지난 2021년 2월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비상임조합장 연임 횟수를 제한하는 농협법 개정안을 발의하자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이 세종시 농림축산식품부 앞에서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후 신정훈·윤미향 의원 등도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최종 조율된 법안은 적용을 16년이나 유보하면서 그 취지를 크게 퇴색시켰다. 그나마도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둔 최근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통과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지난 2021년 2월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비상임조합장 연임 횟수를 제한하는 농협법 개정안을 발의하자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이 세종시 농림축산식품부 앞에서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후 신정훈·윤미향 의원 등도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최종 조율된 법안은 적용을 16년이나 유보하면서 그 취지를 크게 퇴색시켰다. 그나마도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둔 최근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통과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A조합 조합장 역시 현재 3선으로, 비상임 전환에 실패하면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A조합 대의원들은 이 부분을 부각시키며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A농협 대의원 B씨는 “비상임조합장은 3선 조합장의 연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 조합에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법에 따라 당연히 전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다수의 대의원이 법 자체를 공정치 못하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료 대의원 C씨 역시 “조합장을 비상임화하고 상임이사를 두는 건 농협 장기근속 직원을 ‘챙겨주는’ 것밖에 안 된다. 퇴직 1년 남겨둔 직원을 상임이사로 앉혀놔 봐야 조합장 꼭두각시가 될 뿐이다. 이미 우리 조합에서 2011~2013년 상임이사제를 도입해 봤다가 무의미하다 판단해 폐지한 적이 있다”고 거들었다.

주목할 만한 건, 대의원들의 이같은 목소리가 한두 사람의 반감이 아니라 집단적인 토론을 통해 도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합장 비상임화 논의가 등장한 직후 몇몇 대의원들이 모여 그 문제점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A농협발전협의회’라는 임의조직으로 논의 테이블이 구체화됐다. 조합 대의원 40여명과 이사 3명을 포함해 이장·새마을지도자·부녀회장, 그리고 마을별로 추천을 받은 평조합원 등 총 70여명이 참여하는 조직이다. 최근엔 비상임조합장 이슈를 넘어 마트·주유소 이전의 비효율성, 부동산 매입액 과다책정 등 조합 경영 전반의 문제에까지 견제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대의원 B씨는 “예전엔 총회에 안건이 올라오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표결 거수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발전협의회를 통해 비상임조합장 등 조합의 여러 문제를 대의원들이 꼼꼼히 인지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됐다. 조합장이 모이라면 모이고 가라면 20만원 받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대의원들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기 무제한’으로 대표되는 비상임조합장제의 폐해는 그동안 농협 전문가들에 의해 지역농협 개혁의 핵심 과제로 지적돼 왔고, 이제는 그 폐해를 몸소 겪어 온 조합원들이 법을 부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단편적인 문제 제기가 아니라 ‘대의원회’, ‘발전협의회’ 등 민주적 의사 형성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법률 정비가 매우 시급해졌음을 의미한다.

현재 국회엔 비상임조합장 임기를 상임조합장과 똑같이 제한(3선)하는 농협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하지만 대표발의 의원들의 필사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개정안은 ‘2039년부터’ 효력을 발휘하도록 설계됐다. 설령 법안이 통과된다 해도 2039년까지는 비상임조합장 장기집권의 폐해를 묵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A농협발전협의회는 향후 농협중앙회 등 중앙 단위와의 논의와 의견 개진을 통해 현행법의 부당성을 밝히고 조합원 의사를 관철할 방법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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